<백두대간산마을><산사람>호림부대 출신 황극성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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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태가 쓴 『남부군』에는 빨치산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빨치산들은 눈덮인 지리산에서 동에 번쩍,서에 번쩍 하며 하룻저녁에 산길 1백여리를 내달리곤 한다.
그러나 빨치산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남한의 호림부대 대원들이역시 그랬다.
호림부대는 해방이후 북한에서 내려온 젊은이들로 이루어졌던 서북청년단이 와해되면서 다시 구성된 부대다.아마 그들은 산 타는기술이 능숙한 산악인들과 비교해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귀둔1리에 사는 황극성(64)씨는 호림부대 대원이었다.
귀둔리가 고향이었던 황씨는 1949년 귀둔리 앞 화채봉을 경계로 나있던 38선을 넘었다.사상문제로 해방후 북한당국의 박해를 받은 것이 월남 이유였다.당시 귀둔리는 북한에 속해 있었다.월남후 그는 서북청년단에 들어간다.
서북청년단이 해체되고 다시 조직된 것이 호림부대였다.호림부대는 곧잘 군작전의 일환으로 38선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그럴 때면 하룻저녁에 산을 70~80리씩 타는 것은 예사였고,급하면1백여리 이상도 마다하지 않았다.하룻저녁에 점봉 산에서 향로봉까지 가기도 했다.
『당시에 부식인들 제대로 있었겠어.칡이나 감자도 캐먹고 정 배고플땐 뱀도 잡아먹었지.그러면서도 산길 1백여리를 예사로 다녔어.거의 산짐승이나 진배없었지.』 그는 호림부대에서 나온 뒤귀둔리 옆마을 현리에 있었는데 6.25때 미처 후퇴하지 못했다.그래서 「방태산 결사대」를 만들었다.이 결사대는 한창때 대원이 7백여명까지 되었다.그는 이 결사대에서 7중대장을 했다.
그는 59년 제대한 후 60년 귀둔리에 정착했다.산채 재배 등 여러가지 일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결혼도 했지만 실패하고 현재 혼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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