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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 시시각각

그날 그 바닷가의 공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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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북한군 초병은 당연히 금강산 관광객이란 걸 알았을 것이다. 서라고 했는데 달아나기에 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전에 달아나는 사람은 쏘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것인가. 초병은 달아나는 사람을 쏘지않고 놓치면 벌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여도 쏘았을까.

그곳에 들어올 사람은 남한 관광객밖에 없을 터인데 “달아나면 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면, 공포스러운 일이다. 관광객이 무장을 할 리 없고, 정탐할 군사시설도 없으며, 무엇보다 금강산은 남북 화해의 성소(聖所)인데, 발포 명령은 너무나 공포스러운 일이다. 공포는 원래 공포에 대응하는 것이다. 금강산에서 남한이 주는 공포는 하나도 없는데, 남한이 주는 것이라곤 해변의 소음과 달러뿐인데, 그들은 무엇이 두려워 공포로 대응하는가.

1983년 미국과 소련 사이엔 공포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압박했다. 83년 레이건은 단거리 핵미사일을 소련에서 가까운 서유럽에 배치했다. 그해 9월 1일 뉴욕을 출발한 대한항공(KAL) 007편이 항로를 벗어나 소련 캄차카 반도 영공으로 들어갔다. 수호이 전투기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는 출격명령을 받았다. 관제소는 오시포비치에게 비행기의 비상등이 깜박거리는지 물었다. 깜박거리면 민간기라는 뜻이었다. 비상등은 깜박거렸지만 본부는 비행기를 유도 착륙시키라고 명령했다.

오시포비치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잉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창문으로 봐도 승객의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서 여객기를 개조한 정찰기로 생각했다. 조명탄 네 발로 여객기에 착륙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사할린 상공에서 오시포비치는 미사일을 쐈고 269명이 죽었다. 미국인 55명도 타고 있었다. 오시포비치는 나중에 사고 현장 비디오를 보고 여객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비디오를 숨기고 계속 정찰기라고 우겼다. 비극의 조종사는 지금 러시아 남부에서 생계를 걱정하며 살고 있다.

그로부터 약 3주 후 모스크바에서 88km 떨어진 대공 감시 벙커.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중령은 인공위성 레이더를 지켜보다 경고음을 들었다. 미국이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신호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있을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바로 3주 전 소련이 KAL기를 격추했으므로 레이건이 보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페트로프는 규정상 이런 일은 즉각 보고해야 했다. 보고는 안드로포프 서기장에게 올라가고 서기장은 보복공격을 명령할 것이다. 그러면 핵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페트로프는 신중했다. 인공위성 레이더에서는 미사일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지상 레이더엔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트로프는 잘못된 신호라고 판단했고 상관에게 “잘못된 정보”라고 보고했다. 나중에 소련 당국은 조사를 실시했으며 예측하지 못한 각도에서 구름에 발사된 햇빛이 경고음을 일으켰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 FOX TV의 저널리스트 크리스 윌리스는 『대통령의 위기』라는 책에서 이 사실을 공개하며 “페트로프가 핵전쟁을 막았다”고 적었다.

소련은 사라지고 북한은 공포스럽게 닫혀있는 유일한 나라가 되어있다. 북한 주장이 사실이면 초병은 오시포비치였다. 그가 페트로프였다면 ‘우리 민족끼리’라는 북한이 남한 동포를 사살해 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북한이 여인을 안전하게 돌려보냈다면 남한 동포는 더욱 밝은 화해의 빛줄기를 보았을 것이다. 태어나 세상이라고는 북한 군대밖에 보지 못했을 초병에게 페트로프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이나 다른 군부 지도자는 왜 페트로프가 되지 못하는가. “쏘지만은 말라”는 명령만 내려놓았어도 이런 분노와 슬픔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인은 얼마나 공포에 질렸을까. 닫힌 사회, 닫힌 사람들이 내뿜는 공포가 태풍처럼 가슴을 때린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