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조>TV파괴력과 '視聽등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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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뉴트 깅그리치 미 하원의장은 2월 29일 각각 방송사 간부들을 만나 TV 프로그램에도 영화처럼 시청등급을 매기기로 했다.
가정의 결속력과 학교의 영향력이 크게 떨어진 마당에 그나마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 TV마저 퇴폐.폭력적인 프로를 양산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사회지도층의 이같은 행동은 시의에 맞다.
그러나 TV 프로그램에 등급을 매기는 것이 무분별한 섹스와 폭력으로 얼룩진 TV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 돼서는 안된다.
한 두편의 폭력물이 시청자로 하여금 폭력을 휘두르게 하지는 않는다.하지만 TV는 시청자들의 도덕적 감수성을 변화시키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처럼 강력한 TV가 담고 있는 메시지다.요즘의 TV광고들은 개성을 강조하다 못해 「자기만의 원칙」과「온갖 억압에서의 해방」을 부추기고 있다.낮시간의 토크쇼는 외설스런 노출을미덕이라고 찬양한다.황금시간대(프라임 타임)에 방송되는 프로에서도 10대들의 난잡한 성생활과 폭력행사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TV에서 겸손과 예절,신중이나 근엄은 오히려 눈총받는 「천덕꾸러기」가 돼버렸다.
이에 대해 방송국 관계자들은 『TV프로는 현실을 반영할 뿐 사회에 해악(害惡)을 끼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그들은 오히려TV에 나오는 섹스와 폭력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며 너스레를 떤다.『젊은이들이 TV의 영향을 받는 것은 잠시』라며그저 통과의례로 생각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TV의 위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TV프로는 알게 모르게 철학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젊은이들의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지난 30년동안 우리는 사회적 타락이갈수록 심해지고 있음을 목도해왔다.아동학대.혼외 정사.이혼을 위한 낙태.약물복용.폭력 등.그런 와중에 절도와 예절은 사라졌다. 오늘날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준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역할을 부여받은 셈이다.그들은 좋고 나쁜 일에 다 쓰일 수 있는 횃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TV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시민사회의 질서와 규 율을 깨뜨리면서 돈을 벌고 있다.그러나 그들 자신은 섹스와 폭력이 아니더라도 더 많은 명예와 돈을 움켜쥘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정리=은종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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