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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레터] 로즈버드, 아주 사소한 것의 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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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오손 웰즈(1915~85)의 유명한 영화 ‘시민케인’(Citizen Kane·1941)에는 ‘로즈버드’(장미꽃 봉오리)란 말이 아리송하게 등장합니다. 여기서 로즈버드는 출판계의 거물로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온 주인공의 온전한 모습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퍼즐조각 같은 것으로 나옵니다. 왜냐면 대저택에서 임종의 순간을 맞은 케인이 쉬지않고 중얼거린 말이 바로 “로즈버드…”였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한 기자는 그의 과거를 추적하며 로즈버드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비밀을 캐지 못하지요. 뜻밖에도 수수께끼는 우연히 인부들이 그의 유품을 불에 태우는 장면에서 풀립니다. 한 인부가 어떤 물건을 불길 속으로 던지는데 그 물건에 ‘로즈버드’란 단어가 쓰여 있던 것입니다. 그것은 케인이 어릴 때 집 앞에서 타고 놀던 썰매였습니다. 그가 소유했던 돈과 권력도 어쩌면 어릴 적 그에게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 썰매 하나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일까요.

최근 나온『로즈버드』(웅진지식하우스)의 저자 피에르 아술린은 자신이 전기작가가 되는데 이 영화가 한몫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로즈버드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진짜 모습을 폭로하는, 보잘것없고 사소한 그 무엇입니다. 그는 무한히 작은 디테일에서 “(전기의)주인공이 벌이는 그림자 연극의 핵심”을 본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프랑스의 유명한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로즈버드로 그가 항상 들고 다니던 ‘접이식 의자’를 꼽습니다. 부다페스트 국립미술관에서 브레송은 그 의자에 앉아 고야의 그림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지요. 그가 앉아 그림을 감상하고, 데생을 즐기고, 휴식을 취한 의자는 브레송의 ‘시선’을 상징합니다.

또다른 신간『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정혜윤 지음, 푸른숲)는 정이현·신경숙·박노자 등 11인의 책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들 삶의 로즈버드를 그들의 서재에서 더듬어본 것이지요. 이중에서 임순례 감독의 이야기가 눈에 띕니다. 고교 때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고 같은 제목으로 작문하면서 그가 슬프다고 꼽은 것들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거칠게 예의 없이 구는 것, 인간이 동물을 학대하는 것,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것….” 이 짧은 문장에 ‘세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을 만든 그의 로즈버드가 엿보입니다.

아주 사소한 듯 하지만 개개인의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를 띠는 로즈버드는 아주 일상적이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만나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림일 수도, 장소일 수도, 사람일 수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나 미소 일수도, 한 권의 책일 수도, 기막힌 맛일 수도, 어느 순간 보았던 빛일 수도 있겠죠. “디테일에 인생의 경이로움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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