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첩 출신이…” 수모 딛고 모스크바 유학길 올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0호 34면

1925년 10월 모스크바로 떠나기 직전 상하이대학 동기생들과 송별연을 마친 셰쉐훙. 앞줄 오른쪽에서 둘째가 셰쉐훙. 뒷줄 오른쪽 첫째가 린무순. 김명호 제공

1921년 일본에서 귀국한 셰쉐훙은 대만문화협회에 가입했다. 자산가와 중산층 출신 지식인들이 결성한 대만 최초의 정치결사였다.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후예들이 아직도 간혹 사용하는 계몽·의식·각성 등의 용어가 강령을 도배하다시피 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었지만 그나마도 없었더라면 좀 허전했을 그런 단체였다. 신문·잡지 등을 발간하며 수시로 강습회를 개최했다. 셰쉐훙은 주로 노동자들을 상대로 지하활동을 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대만 여성 혁명가 謝雪紅<中>

1924년 남편과 함께 대만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중국 측 관방 자료에는 “일본 관헌의 감시”와 “조국의 혁명을 마음속으로 동경했기 때문”이라고 돼 있지만 남편의 사업실패가 원인이었다. 배 안에서 린무순(林木順)이라는 청년을 만나 호감을 느꼈다. 린은 후일 수많은 전설을 남겼지만 당시는 타이베이사범학교 미술과 퇴학생이었다. 나이는 셰보다 두 살 연하였다.

당시 상하이에선 일본인 자본가와 임금투쟁을 벌이던 한 노동자의 죽음이 반일 파업과 철시, 학생들의 수업거부로 이어져 도시 전체가 난리통이었다. 셰쉐훙은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상하이총공회’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여했다. 5월 30일 절정에 달한 시위는 6월 말까지 계속됐다. 대만에서 항일운동이랍시고 하던 것과는 격이 달랐다.

5·30운동을 계기로 셰쉐훙은 중국공산당의 주목을 받았다. 이 덕분에 상하이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중공의 혁명교육기지였던 상하이대학에는 먼저 와있던 대만 학생들이 여러 명 있었다. 후일 대만공산당의 최대 파벌을 형성하게 되는 이들은 셰를 같잖게 보았다. “사회운동에 감히 여자가 끼어든다”면서 어처구니없어 했다. 게다가 학교 문턱에는 가본 적도 없는 첩 출신인 것을 알고는 “보기만 해도 재수없다”며 학교를 옮겨버린 학생들도 있었다. 야비한 농담을 거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식민지일수록 남성우월주의가 판을 치고 권위적이고 비열한 법이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싱거운 여자보다는 싱거운 남자가 더 많기 마련이다. 셰쉐홍은 어린 시절부터 수모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끄떡도 안 했다.

셰쉐훙의 진면목을 본 남편은 놀라서 도망가 버렸다. 나름대로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셰쉐훙은 린무순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은 셰쉐훙에게 소련 유학을 권했다. 셰는 린무순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셰쉐홍은 고리키가(街)의 푸시킨광장에 있는 스탈린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에, 린무순은 중산(中山)대학에 입학했다. 숙식은 학교에서 제공했고 매달 50루블씩 용돈도 받았다. 교육과 노동이 결합된 고된 학교 생활이었다. 셰쉐훙은 중국·일본·조선·몽고·인도·월남 등에서 온 청년들과 어울리며 피압박의 경험을 교환했다. 외국어에 능한 린무순이 항상 그의 말을 통역했다.

대만 시절 자신의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던 셰쉐훙은 일본에 와서야 비로소 대만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상하이와 모스크바 시절은 중국인과 인류의 고통을 파악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셰쉐훙이 식민지 대만의 해방운동을 장악하고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下에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