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만 달러 그들에겐 ‘국민 화합’ DNA가 있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0호 12면

영국경제 부활을 상징하는 런던 동부의 카나리 워프에 몰려 있는 금융회사들이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있다. 블룸버그 뉴스

“이젠 3만 달러가 화두다.” 국가정보원 간부 A씨에게 “왜 그런 보고서를 만들었느냐”고 묻자 몇 번을 강조했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 겨우 도달했지만,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3만 달러 클럽’ 진입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소리였다.

국정원이 포착한 ‘19개 일류국가’의 노하우

국정원은 최근 ‘21세기 일류국가들의 성공비결’이란 240여 쪽짜리 보고서를 펴냈다. 국경 없는 ‘경제 전쟁터’를 누비는 코리안 첩보원들이 한 달간 현장을 찾고 자료를 이 잡듯 뒤져 선진 19개국의 ‘경쟁력 DNA’를 집대성했다. 저성장의 덫에 걸린 한국이 ‘3만 달러’ 시대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국정원이 만든 보고서의 표지

보고서에 등장하는 런던 동부의 금융 신도시 카나리 워프도 그중 하나다. 40~50층 높이를 자랑하는 HSBC·씨티그룹의 사옥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허허벌판이던 카나리 워프엔 세계 굴지의 50여 개 금융사가 둥지를 틀었다. 요즘 이곳의 기상은 하늘을 찌른다. ‘미국 월스트리트가 대수냐’는 자신감이다. 실제로 몇 해 전부터 사람이며 회사며 돈이 런던으로 몰리는 추세다. 카나리 워프야말로 ‘영국의 부활’을 상징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한국도 동북아 금융허브를 꿈꾸지만 장담과 달리 현실은 자꾸 멀어지고 있다.

시들던 노국(老國)에서 이런 힘이 나온 비결은 뭘까. 국정원은 강력한 정치 리더십 아래 ‘규제 파괴’에 주목했다. 국민이 하나가 돼 추진한 은행·증권업 간 장벽을 부수고, 시장 빗장을 외국에 열어젖힌 ‘금융 빅뱅’이 밑거름이었다는 소리다. 이런 대수술은 여러 곳에 단비를 뿌렸다. 상한가를 달리는 축구도 그 덕을 봤다면 엉뚱한 소리일까? 그러나 “영국 프리미어 축구가 독일 분데스리가를 앞선 이유를 아는가. 세금 많고 재산 규제가 심한 독일을 피해 최고의 선수들이 영국으로 건너왔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국정원 A씨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95년 1만1432달러로 1만 달러를 넘은 뒤 12년 만인 지난해 가까스로 2만 달러를 돌파했다”고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중 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 ‘아너스 클럽’에 속한 곳은 19개에 불과하다. 한국의 갈 길이 멀다는 소리다. 그는 “아너스 클럽 회원국들은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가는 데 평균 9년이 걸렸다”고 했다. 우리와 경제 체형이 비슷한 ‘강중국(强中國)’ 그룹인 독일·이탈리아 등도 10년 넘게 소요됐다. 앞으로 10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픽 참조>

그는 “역사를 보면 외환·경제위기를 겪은 뒤 10년 뒤에 이념대립이 심해지고, 집단욕구가 분출하며, 사회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대혼란의 시기가 여지없이 찾아왔다”며 “이를 현명하게 극복하면 선진국이 됐다”고 했다. 영국도 76년 위환위기를 맞아 고생하다 86년 마거릿 대처 총리가 강력한 리더십으로 빅뱅 같은 구조개혁으로 활로를 뚫었고, 국가경쟁력 1위로 꼽히는 핀란드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A씨는 공통 해법이 있다고 했다. “갈등 예방 시스템을 만들고, 경제·정부 조직을 수술하며, 인재를 끌어 모아 생산성을 높이면 살길이 보였다.” 예컨대 아일랜드는 3고(환율고평가·고금리·고임금)로 87년 국가 파산상태에 돌입한 ‘빈국’이었다. 그러나 노사정 대통합을 끌어내 노조는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정부는 복지망을 구축하며 외자유치에 온 나라가 뛰어들어 10년 만에 ‘켈틱 호랑이’라는 찬사를 따냈다. 네덜란드도 재정적자와 실업·파업으로 ‘유럽의 중환자’로 불렸지만 82년 ‘폴더(polder·간척지) 모델’이라 불리는 노사정 합의를 통해 유럽의 물류 왕국으로 거듭났다. 국정원은 “한국도 외환위기 뒤에 사회 통합을 위해 계층 간 합의에 주력했지만 사실상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공무원 DNA를 ‘권위에서 시장으로’ 바꿨다는 사실도 비슷했다. 보고서는 혁신으로 평가받는 뉴질랜드의 정부조직 개편이 대표적이라고 소개했다. 이 나라는 85년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 10년간 8만여 명의 중앙부처 공무원을 절반으로 축소했다. 퇴출 공무원에겐 1년치 연봉을 주고 정부 하도급 업체에 취업할 수 있도록 해 반발을 줄였다.
아너스 클럽 회원국들은 펄펄 끓는 ‘두뇌 용광로’를 만들어 먹고살 거리를 키우는 일에도 천착했다. 보고서는 ‘국적(國籍)을 묻지 않고 실적(實績)을 묻는다’는 미국의 글로벌 인재관이 좋은 예라고 했다. ‘아메리칸 브랜드’의 대명사인 코카콜라만 해도 북아일랜드 출신인 네빌 아이스델 최고경영자(CEO)에 이어 지난해 말 터키에서 자란 무타르 켄트를 새 수장에 임명했다. 경쟁사인 펩시콜라도 마찬가지. 인도 태생의 인드라 누이가 사장이다.

실제로 미국은 해마다 각국에서 몰려드는 유학생이 57만 명으로 세계 1위이고, 박사학위 취득자의 3분의 1을 외국인이 차지하며 그중 30%는 미국에 잔류한다. 국내총생산의 2.6%(유럽 1.2%, 일본 1.1%)를 고등교육에 투자하고, 대학의 연구개발(R&D) 세제혜택을 영구화하는 등 교육 뼈대를 튼튼히 하기 위해 노력한 덕이다.

반면 한국의 현실은 암울하다. 이공계 기피 현상은 물론이고, 고급 인력이 국내에 잔류하는 비율만 봐도 95년 세계 4위였으나 최근엔 40위로 떨어졌다.

국정원은 최근 OECD의 교육투자 효율성 지수에서 체코·일본에 이어 3위에 오른 아일랜드의 ‘맞춤형 인재’ 공급도 눈여겨볼 만하다고 했다. 이 나라는 2001년부터 1년 단위로도 학위를 만들어 사회에 일찍 진출할 수 있도록 하고 대학·기업 간 교육과정 연결, 대학 강의와 자격시험 연계 등의 수술에 나섰다. ‘졸업장 위주’에서 ‘친기업 위주’로 바꿨다는 얘기다.

국정원의 눈으로 본 경쟁력 원천의 키워드는 뭐냐는 물음에 A씨는 “결국은 지도자의 리더십”이라고 했다. 다만 절대적 지도자라기보다 국민 속에 권위가 녹아 드는 리더십이어야 하고, 범주는 여야를 망라한다고 말했다. 결국은 국민 통합을 이끌어 내는 타협의 리더십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한국경제 대외의존도가 80%에 이른다.

국익에 초점을 맞춰 볼 때 해외 경제정보를 제대로 획득하지 못하는 정보기관은 직무유기”라며 “지금 3만 달러 고지 정복의 꿈을 품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