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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혼돈 속에서 진실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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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러면 이러한 혼돈 속에서 어떻게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객관적 진실’을 밝혀낸다고 인정받고 있는 과학계의 방법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수년 전 필자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앤더슨(P W Anderson) 교수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과학적 진실이 신뢰받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앤더슨 교수는 “과학자들이 일반 시민보다 특별히 정직한 사람이라서 과학이 객관적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계에서는 남이 틀린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인정받기 때문에, 거짓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소수의견을 포함한 모든 주장이 공개적으로 펼쳐지고, 이에 대한 논증과 반박이 끊임없이 이어지면 궁극적으로 진실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점과 주장이 다양한 언론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진실을 밝히는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나 우리나라의 공업용 우지(牛脂)라면 파동의 예에서 보듯, 언론이 집단적으로 편향된 보도를 하면 진실은 가려지고 개인이나 사회는 많은 피해를 보게 된다. 특히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동업자 봐주기’ 문화가 팽배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려면 다양한 언로(言路)의 확보는 필수적이다. 물론 인터넷의 확산으로 이제 언로의 통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래도 방송이나 신문 등 영향력이 큰 공식적인 언론매체의 다양화는 의미있는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언로의 다양화가 곧바로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과학계에서는 언로의 다양화를 통해 소수의견을 보호하는 것 외에, 객관적 사실 규명을 위해 엄격히 적용하는 몇 가지 규범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짓말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과학연구의 수많은 실험을 모두 재현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단 연구자들이 논문에 제시한 데이터는 정확한 것으로 간주한다. 대신 어떤 연구자가 의도적인 거짓이나 과장을 한 것이 밝혀지면 영구히 학계에서 추방하는 가혹한 처벌을 내린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학자의 말이나 증빙자료를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실 황우석 사건 때 학계의 처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느끼는 일반 국민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공동체의 신뢰를 잃지 않으려는 과학계의 규범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학설의 진위 여부를 철저히 실험적 관측에 부합하는지 여부로만 판단하지, 그것을 뛰어넘는 이념이나 종교 등에 의한 해석은 배척한다는 것이다. 중세 서양의 종교적 신념에 맞는 천동설(天動說)보다 실험적 사실에 맞는 지동설(地動說)을 인정한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반면 게르만 민족이 우월하다는 인종주의에 기초한 나치 독일의 우생학(優生學)이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일치한다고 스탈린이 지원한 소련의 리센코(T D Lysenko) 농업생물학 이론은 학문적으로도 실패했을 뿐 아니라 사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쳤다. 이처럼 개인적 편견이나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미리 결론을 내리고 다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데 있어 결정적 장애가 된다.

우리 사회가 언로는 터졌지만 진실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이러한 규범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자기주장을 합리화하려고 거짓말과 과장을 일삼는 것,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의 말할 기회를 박탈하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삶과 일을 방해하는 일 등은 진실을 밝히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회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커다란 해악이다.

오세정 서울대 자연대학장·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