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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비틀 몰며 비틀스를 듣자…Come Togethe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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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스스로 주차를 하고, 알아서 속도를 조절하는 자동차가 나오는 시대다. 에어컨과 파워스티어링은 기본이고 경차에도 후방주차센서까지 달려 나온다.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자동차를 비롯한 세상 모든 물건이 진화하고 있다. 이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다. 진화 대신 퇴행을 스스로 택한 사람들. 이른바 ‘올드카 매니어’들이다. 이들은 낡고 불편하고 오래돼서 자동차가 좋다고 한다. 천천히 남들보다 뒤처져서 달리는 게 더 멋있다고 한다. 남과는 조금 다른 그들의 ‘자동차론’을 들어봤다.

그룹 ‘비틀스’가 좋아서 ‘올드비틀’을 장만했다는 이동혼씨. 그는 ‘낡고 불편한 게 올드카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박종근 기자


◇나의 비틀스, 그리고 비틀=진공관 오디오 매니어인 이동훈(39)씨가 올드카에 빠진 건 13년 전. 그룹 비틀스의 ‘애비 로드(ABBEY ROAD)’ 앨범을 LP로 듣고 있다가 우연히 앨범재킷 사진 구석에 나온 작은 차를 발견했다. 폴크스바겐 비틀이었다.

“저 차를 갖고 싶다.” 처음으로 오디오가 아닌 자동차가 갖고 싶어졌다. 수소문 끝에 멕시코에서 한정 생산된 2000년식 남색 올드비틀을 구했다. 그는 “올드비틀을 운전하면서 비틀스의 ‘컴 투게더(Come Together)’를 듣는 기분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올드비틀은 공랭식 엔진이 차 뒤쪽에 달려 있다. 물이 아닌 공기를 이용해 엔진의 열을 식히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털털털’하는 오토바이 같은 소리가 난다. 에어컨은 없다. 창문은 수동이기 때문에 더울 땐 빨리 손잡이를 돌려 창문을 여는 기술도 필요하다. 히터도 약해서 겨울엔 무릎담요가 필수품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그가 비틀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버튼만 누르면 다 되는 디지털 세상이지만 올드카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남아 있죠.” 자동변속기나 자동문, 에어컨 같은 편의장치는 오히려 올드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최근에 옆면이 흰색인 ‘백테타이어’를 만들기 위해 8시간에 걸쳐 타이어에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다. 차 뒤를 장식하기 위해 가죽트렁크도 장만했다. 비틀을 꾸미고 닦고 관리하는 게 그의 즐거움이다.

“비틀은 1930년대 가장 진보적인 소형차였습니다. 70년이 지난 지금 그 디자인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남에겐 고물, 나에겐 보물=“20년쯤 뒤에 일곱 살 난 딸이 시집갈 때 웨딩카로 쓸 겁니다. 그때까지 열심히 조이고 닦고 아껴야죠.” 포니·프레스토·그랜저를 소유한 김수현(35)씨의 작은 소망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점찍어둔 차는 바로 86년식 그랜저.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나온 최초의 그랜저다.

김씨가 어린 시절 동경하던 그 차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어느 집 앞에 주차돼 있는 걸 보고 다짜고짜 그 집 주인에게 팔라고 했다. 몰고 돌아오는 길에 서버려 견인차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기도 했지만 김씨의 복원 작업 덕분에 그랜저는 이제 쌩쌩하다. “당시 판매가격이 1950만원의 고급차예요. 아파트 한 채 값보다도 비쌌죠. 크루즈컨트롤과 에어컨, 파워스티어링과 전동시트, CD플레이어까지 달려 있죠. 요즘 차 못지 않아요.”

각진 디자인 때문에 ‘각그랜저’로 불리는 차 안에 남들이 모르는 이런 첨단사양이 장착돼 있다는 것도 재미를 주는 요소다.

20대에 김씨는 자동차 튜닝에 빠진 적이 있었다. 고성능의 스포츠카도 동경했었다. 하지만 이젠 생각이 달라졌다. “옛 모델을 순정 그대로 살리는 게 곧 역사를 만드는 것”이라는 것다.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가치다. 올드카를 몰면서 또 다른 취미가 생겼다. 전국 어디로 여행을 가도 그 지역의 폐차장을 꼭 들른다. 굴러다니는 폐부품 중에 쓸만한 것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다. 그냥 두면 고철덩어리일 뿐이지만 그에겐 ‘보물’이다.

◇추억을 싣고 달리는 식구=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린 그해에 황영권(32)씨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때 가족은 생애 첫 차를 장만했다. 진회색의 스텔라였다. 아버지는 차를 애지중지했다. 손재주가 있어 손수 차를 정비하곤 했다. 그 옆에서 함께 차를 만지고 뜯고 하면서 차와 정이 들었다. “집에 쭉 있었고 계속 봐온 차입니다. 무엇보다 가족의 역사가 담긴 또 하나의 식구죠.”

20년 지기인 차이지만 다루긴 조심스럽다. 황씨는 스텔라를 몰 땐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운전하고 다른 차가 끼어들면 늘 양보한다. 자칫 무리하다가 차도 운전자도 고생하기 때문이다. 출퇴근용 세컨드카를 따로 마련한 것도 2005년 사고 때문이다.

“출근하다가 뒤에서 요즘 나오는 신차가 와서 살짝 박았어요. 그 차는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한데 제 차는 범퍼가 내려 앉았죠.” 수소문 끝에 대구에서 부품을 구하긴 했지만, 작업방식이 요즘 차보다 복잡했다. 정비소는 수리비를 신차의 두배인 50만원을 불렀다. 가해자도 놀랐고, 황씨도 황당했다. 그 이후부터 사고는 사절, 무조건 안전운전이 철칙이다.

요즘 10대, 20대들은 스텔라를 모른다. 엠블럼도 요즘 현대차와 달리 ‘HD’라고 쓰여 있어 외제차냐는 질문도 가끔 받는다. 어르신들은 정말 반가워한다. 지난해엔 동호회원들과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수입차 한 대가 계속 따라왔다. 서해안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만난 그 수입차 오너, “경부선을 타고 가다 너무 반가워서 쫓아왔더니 서해안까지 왔다”며 웃었다. 주말마다 스텔라를 점검하는 게 황씨의 낙이다. 딱 한 번 사고 나서 견인한 거 외엔 차가 갑자기 선 적은 없다. 더 이상 수리를 못하거나, 달리지 못할 때까지 황씨는 스텔라를 ‘퍼스트카’로 삼을 생각이다.

◇국산차 역사 담은 타임머신=“포니1을 거의 다 복원했습니다. 곧 달릴 수 있어요.” 이일혁(48)씨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찌그러지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79년식 포니1을 2년 가까이 걸려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그에게 포니1은 단순한 올드카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이명상(세라믹 전문업체를 운영)씨가 개발한 점화플러그가 장착된 최초의 국산 고유의 차다. 그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10여 년 전부터 옛날 차를 뒤적거리다가 올드카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철강회사를 운영하는 그는 차가 여러 대 있다. 그중 좋아하는 차는 81년식 코티나 마크Ⅴ. 포드의 부품을 수입해 현대차가 조립한 차다. 조립도 엉성하고 엠블럼도 현대차 대신 포드 마크가 붙어 있지만 그게 오히려 매력이다. “번호판을 붙인 코티나 마크Ⅴ는 전국에 두 대밖에 안 남았어요. 나머지는 번호판이 없는 영화촬영용이죠.” 번호가 있고 없고는 그에게 중요하다. 있으면 살아있는 차이지만 없으면 죽은 차이기 때문이다. 차는 박물관이 아닌 도로를 달려야만 진짜 차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우리나라에 한 대밖에 없는 56년식 노란색 뷰익 센추리도 여전히 도로를 달린다. 엔진이 고장 났지만 수리 끝에 그가 살려냈다.

그에게 올드카는 일종의 타임머신이다. “그 차를 타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우리 나이 남자들이 놀 데가 없잖아요. 그런데 올드카를 취미로 삼으면 가족과 함께 야외로 드라이브를 다닐 수 있으니, 이런 건전한 놀이문화가 없죠.”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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