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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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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함께한 시간과 기억이 쌓여서 인간 관계를 이룬다는 건 자명한 얘기다.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은 곧잘 이 자명함을 역설적으로 이용해 재미를 추구해왔다. 아침마다 깨어나면 늘 같은 날짜에 달력이 머물러있는 불가사의한 상황에서 날마다 한 여인의 사랑을 새로이 얻기 위해 노력하는 남자의 얘기인'사랑의 블랙홀'(1993년)이 그런 예다. 여기에 오는 15일 개봉하는 '첫 키스만 50번째'도 '사랑의 블랙홀'과 비슷한 설정이다. 다만 이번에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 여주인공이라는 점이 다르다.

하와이의 동물원에서 수의사로 일하는 헨리(애덤 샌들러)는 동네식당에 갔다가 혼자 밥을 먹는 루시(드루 배리모어)에게 매혹된다. 다가가 말을 걸어 다음날 만나자는 약속까지 받아낸 건 좋았는데, 다시 만난 루시는 그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취급한다. 알고 보니 루시는 1년여 전 교통사고를 당한 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다.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일을 모두 잊고 매일을 교통사고가 발생하기 전날로 알고 있는 것이다.

전반부는 아버지와 남동생이 루시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루시가 '오늘'이라고 믿는 날의 일화를 매일같이 반복하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돋운다. 그 바통을 이어받는 것이 헨리다. 딸이 상처 입을까 싶어 둘의 만남을 결사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루시와 매일 우연을 가장해 마주쳐 호감을 얻으려 하고, 교통사고 이후의 일을 요약한 비디오를 아침마다 보게해 자신이 남자친구임을 깨닫게 하려는 노력은 가히 원맨쇼 수준이다.

코미디언 출신인 샌들러의 원맨쇼 영화는 국내 팬들도 진력이 날 만큼 보아온 터다. 하지만 영화는 영리하게도 전후좌우에 풍성한 얘깃거리를 깔아 그 같은 반감을 줄인다. 하와이 원주민 출신인 헨리 동료의 익살이나, 루시를 보호하기 위해 헨리와 좌충우돌하는 음식점 사람들은 영화가 남녀 주인공만의 외길 로맨스로 심심해지는 걸 막아준다.

영화 전체로도 할리우드 로맨스물의 화법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관객을 배려해 고민한 흔적이 적지 않다.

도입부에서 헨리가 사실은 하와이에 놀러온 여성들을 갖은 감언이설로 꼬여 일회성 연애만을 즐겨온 인물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하필이면 '하루살이 사랑'을 거듭해야 하는 루시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 설정에 힘을 실어준다.

헨리가 매일 루시와 만나는 데 골몰해 도대체 일은 언제할까 걱정할 즈음 루시의 입에서 같은 걱정이 터져나와 둘의 관계가 위기를 맞기도 한다.

오늘 하루가 사랑에 빠질 기회의 전부인 루시와 헨리처럼, 영화의 재미는 99분간의 상영 시간이 전부다. 시간과 기억에 대한 깊은 울림이나 색다른 성찰 같은 건 없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사랑은 가능하다는 해피엔딩이다. 15세 이상 관람가.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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