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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情事의 늪에 빠진 팔순 예술가의 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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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강석경(53·사진)씨가 『내 안의 깊은 계단』 이후 5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미불』은 강씨가 이화여대 미대 재학시절부터 30년 가까이 화두로 삼아 온 ‘예술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이다.

강씨는 “십수년 전에 써놓고 서랍 속에 넣어둔 초고 20장을 이번에 완결했으니 정말 늦된 출신”이라고 밝혔다. 강씨는 1980년대 당대의 예술가들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한 적도 있다.
소설은 팔순을 바라보는 일본 유학파 동양화가 이평조와 딸보다 어린 그의 정인(情人) 박진아의 애증 관계를 중심축으로 전개된다.

젊어서 출가해 ‘쌀톨만한 불성’을 뜻하는 미불(米佛)이라는 법명까지 받았지만 속정(俗情)을 버릴 수 없는 본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환속해 화가가 된 이평조는 ‘여자는 내게 생명력을 주는 불로초’라는 생각에 십장생 그림에 그려넣어야 할 불로초 대신 여인의 나신을 그려넣는 인물이다.

이평조는 타오르는 제 몸빛으로 먼발치의 사랑을 비추는 달빛 같은 무욕의 사랑도 경험했지만, 무정한 폭풍우에 흩날려 버리기에 찬란하고 고혹적인, 꽃과 같은 정사(情事)에 더 끌린다. 또 식도암이 전이돼 생명의 불꽃이 사위어 가는 와중에도 진아를 찾아가 격투하듯 정사를 치르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이평조는 수묵화의 흑백 세계보다 추수를 앞둔 금빛 들판 같은 풍요로운 통합의 색채에 오체투지하고 싶어한다. 그에게 색채와의 교감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반면 진아는 벽에 걸어놓는 그림과 액자로는 취향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림에 관한 한 젬병인 여자다. 진아는 베개밑송사로 전세금과 뒤늦은 대학 진학 자금 등을 이평조로부터 뜯어내는 데만 관심이 쏠려 있다. 두 사람이 뜻을 함께하는 경우는 몸의 희열, 치열한 불꽃을 추구할 때 뿐이다.

소설은 이평조와 딸 정미와의 애틋한 혈육의 정, 화업(畵業)에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칠순에 결행한 이평조의 인도행(行), 혼신의 힘을 기울인 전시회 준비 등을 빼면 돌출되는 서사 없이 밋밋하게 진행된다.

구도(求道)와도 같은 이평조의 작업 과정도 진아의 결정적인 배신 전까지는 무리없이 흘러가는 듯했다. 이평조에게 남아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자 진아는 법원에 사실혼 부당파기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해 작업 중인 이평조의 모든 작품을 가압류하도록 한다.

그러나 강씨는 소설의 마무리를 ‘어떤 고난도 진정한 예술혼을 꺾을 수 없는 것’으로 처리한다.

충격적인 마무리와 함께 교양소설처럼 빈번하게 등장하는 해박한 미술 지식과 동양화 제작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강씨 자신의 여행 체험을 녹여 재현한 인도의 정경 등이 『미불』을 읽는 즐거움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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