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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천국은 천당이 아니요, 주체의 개벽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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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 33면

민수기 20장에 보면 모세가 반석을 쳐 물을 나오게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생명수가 콸콸 쏟아지는 바위가 바로 이 근처에 지금도 있다(Ain Musa, 모세의 샘). 그 물이 옛날에는 이 협곡을 가득 메우고 흘렀다. 그래서 나바태안 왕국의 사람들이 댐을 막고 물길을 돌려 이 협곡 지역을 거주지로 만들었다. 대신 절벽을 파 수로를 만들어 식수를 공급하였다. 나바태안 왕국 문명의 높은 수준을 말해준다.

62. 주체의 혁명

제3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에게 이르기를, ‘보라! 천국이 하늘에 있도다.’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보다 먼저 천국에 이를 것이다.
2 그들이 또 너에게 이르기를, ‘천국은 바다 속에 있도다.’ 한다면, 물고기들이 너보다 먼저 천국에 이를 것이다.
3 진실로,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4 네가 너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는 네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5 그러나 네가 너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네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페트라의 협곡은 시크(The Siq)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의 장관이다. 그것은 침식의 소산이 아니라 지각변동으로 거대한 바위가 찢겨 틈을 낸 것이다. 양쪽 바위 높이 200m, 폭 2~5m 정도, 길이 1.2㎞에 이르는 협곡, 그 바닥은 로마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 붉게 타오르는 사암의 미로 끝에서 우리는 충격적인 건축물을 만난다. 카즈네트 알 파라운(Khaznet al-Faraoun, The Treasury of Pharaoh)! 이 성전은 이집트 파라오가 이스라엘 도망자들을 추격하다가 보물을 이곳에 숨겨두었다고 하는 전설 때문에 ‘파라오의 보물창고’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면에는 이집트 여신 이시스가, 양옆에는 도끼 든 여전사 아마조네스가, 후면 감실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가, 아래층 양쪽에는 제우스의 말 탄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가, 꼭대기 지붕 처마 끝에는 나바태안 왕국의 최고신 두샤라(Dushara)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조각되어 있다. 중동문명권과 이집트문명이 혼합된 헬레니즘 양식으로 아레타스왕 3세 때의 작품이다(BC 1세기). 사도 바울은 이곳에 와서 당시는 조금도 흠집없었던 이 코린트 양식의 찬란한 위용을 목격하였을 것이다.사진은 갑자기 휘몰아치는 모래광풍 속의 신전을 잘 포착하고 있다. 태고의 정취가 서린다.

1 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2 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3 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
4 “When you know yourselves, then you will be known, and you will understand that you are children of the living father.
5 But if you do not know yourselves, then you dwell in poverty, and it is you who are that poverty.”

도마복음서는 어디까지나 로기온의 무작위적 컬렉션(random collection)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실로 놀라운 구성력을 과시하고 있다. 제2장에서 천국은 인간의 주체성과 관련하여 간접적으로 암시되었지만 명료하게 그 언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3장에서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과감하게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상식을 전도시키는, 화려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메타포로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제2장의 주제는 우리 ‘주체의 개벽’이었다. 개벽(開闢)이란 말은 우리나라 동학(東學)에서 주된 가르침의 술어로서 활용되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한대(漢代)의 역학(易學)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천지, 즉 하늘(天)과 땅(地)의 새로운 열림[開闢]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세기의 헬라화된 유대인들에게도 천국의 도래란 새로운 천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는 지혜문학 전통에 있어서는 정치적인 새 세상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실존의 주체적 성찰의 문제로서 내면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면화 과정의 심연에서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 그리고 그의 사상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분명 지혜로운 스승이었다. 그의 지혜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든 말든, 그것은 초기교단의 정책에 속하는 문제이다. 도마복음서는 그러한 기독론적·종말론적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이전의 사태이다. 본장은 첫머리에서부터 이미 그런 교단의 조직에 대한 강한 부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교단 조직에 대한 후대의 반발로 보아 이 문헌의 성립을 후대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조직의 경계’는 조직이 형성되어 가려고 하는 매우 초기의 조짐에 대한 일갈인 것이다.

나는 3장에 나타나는 2인칭을 메시지의 신랄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모두 단수로 번역했다. 그러나 콥트어 원문에는 “너희”, 즉 복수로 되어 있다. “너희를 인도한다고 하는 자들”은 교단의 조직을 장악하는 자들이다. 항상 타인을 인도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인간의 구원에 가장 방해를 주는 사람들이다. 집사이든 장로이든 목사이든 신부이든, 이들이야말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헌신해야 하는 사람들이요 인간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물론 예수의 시대에는 집사도 없었고 장로도 없었고 목사도 없었고 신부도 없었다. 따라서 여기 살아있는 예수의 말을 이러한 조직의 ‘꾼’들에 대한 이야기로서 해설할 수는 없다. 단지 예수운동의 시대에도 ‘남을 이끈다고 자처하는 자들’은 항상 타인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어갈 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보라! 천국이 하늘에 있도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길거리 전도사들은 이렇게 외친다: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저 하늘에 있는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천당(天堂)이 아니다. 천국은 저 푸른 하늘에 있는 공중누각의 당호(堂號)가 아니다. 천국은 공간개념이 아니며, 지역개념이 아니다. 천국은 장소적 실체개념이 아닌 것이다. 예수는 천국을 말했을 뿐 천당을 말한 적이 없다. 천국이란 하나님의 나라이다. ‘나라’는 ‘지배(Reign)’라는 추상적 질서를 뜻하며 공간적 왕국을 지시하지 않는다. 왕국(Kingdom)이나 나라라는 문자상의 개념은 우리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질서가 지배하는 어떤 ‘상태’로서 해석했다. 그것은 제2장에서는 ‘주체의 개벽’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주체는 집단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개인(individual)이다. 나 개별적 존재의 주체의 개벽이다. 주체의 개벽이란 주체의 혁명이다. 그것은 정치적 전복과도 같은 일시적인 혁명이 아니라 영원한 의식의 혁명이다. 그래서 예수는 ‘끊임없는 추구’를 말했다. 도중에서 포기함이 없는 추구를 말했던 것이다. 추구와 발견, 번민과 경이, 지배와 휴식, 이 세 쌍의 과정이 주체의 개벽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심오한 개벽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의 인도에 나서는 자들이 무어라 말하는가?

“보라! 천국이 저 푸른 하늘에 있도다!” 이에 예수는 무어라 대답하는가? “타인을 인도한다고 사기 치지 말라! 함부로 구라 치지 말라! 천국이 저 하늘에 있다고 한다면, 그 따위 천국일랑 저 하늘의 새가 그대들보다 더 먼저 도달할 것이니라.”

다음 구절의 말씀은 공간적으로 하늘과 대비되어 “바다 속”으로 되어 있다. 옥시린쿠스파편은 하늘의 대척점으로 “땅속에(under the earth)”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천국이 저 바다 속에, 저 땅속에 있다고 한다면 바다의 물고기가 우리보다 먼저 천국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궁금치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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