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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덩샤오핑에게 길을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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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덩샤오핑 정치의 힘은 시세(時勢)를 장악하는 데에서 나왔다. 맹자의 말대로 왕업을 성취하는 것은 지혜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죽고 덩샤오핑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도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포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는 배제와 청산보다는 편입과 포용의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지연·학연·혈연은 물론 공산당적을 넘어 백락(伯樂)이 천리마를 찾는 방식으로 천하의 인재를 발탁해 개혁·개방의 전사로 만들었다. 심지어 문화혁명을 발동하고 자신을 장시(江西)성 조립공장으로 내몰았던 마오쩌둥에 대해서도 70%는 옳았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자신도 죽으면 그런 평가를 받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그는 마오쩌둥의 술통에서 자신의 술을 빚는 ‘덧셈의 정치’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민심의 바다에 들어간 이후에는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실천을 내세웠다. 그리고 “전족한 여인처럼 걷지 말고 대담하게 실험하라”고 재촉하면서도 ‘항해하는 배 위에서 배를 수리’하는 신중함을 강조했다. 특히 조급한 성과주의를 배격하고 자기 실력을 과장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힘을 기를 때까지는 절대 “앞으로 나서지 말자(不當頭)”고 했다. 이것이 한때 제국을 경영했던 중화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기반이라고 믿었다. 그런 덕분일까. 세계 언론들이 지금 중국의 세기를 선언하고 있지만, 중국은 여전히 낮은 포복으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덩샤오핑에게도 물론 천안문 사건과 같은 정치적 고비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 그리고 기다릴 때를 알았다.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꺼져가던 개혁·개방의 불씨를 되살린 것이 그것이고, “노인은 장점이 많으나 고집이 세다”고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을 때가 그랬으며, 세 번의 정치적 숙청을 당하는 극단의 상황에서 재기를 모색할 때에도 그랬다. 그때마다 그는 항상 머리맡에 두었던 『이십사사(二十四史)』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다시 펼쳐 보았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과반에 달하는 국민의 지지 속에서 화려하게 출범했다. 국내외에서 이명박의 성공신화가 다투어 출간됐고, 대만 대선후보들은 ‘747 공약’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이명박 브랜드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불과 100일만의 일이다. 그동안 실용 너머의 시대정신을 보여주지 못한 채 전임 정권의 허물을 캐는 배제의 정치에 시간을 허비했다. 우파 포퓰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이 난무했고 내놓는 정책은 모두 ‘국민 성공시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여기에 불법과 탈법의 멍에를 멘 내각과 참모들도 쉽게 ‘예스맨’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꽃피었던 경연(經筵)·언관(言官)제도와 같은 최소한의 내부 공론장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는 아무런 권위도 생산하지 못한 채 불임정권으로 전락할 운명에 놓인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출발은 다시 청와대 뒷산이어야 할 것이다. 그곳에서 실사구시의 길을 물어야 한다. 무엇보다 나쁜 시민과 좋은 시민, 순수 촛불과 위장 촛불을 구분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긴밀한 네트워크로 무장한 다중(多衆)의 자기복제가 더욱 빨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민심의 바다에 뛰어 들어 시세를 살펴야 한다. 중국 지도부도 흔들리는 민심 앞에 2억 명이나 되는 네티즌과 인터넷으로 만나지 않았던가. 따라서 ‘힘을 합쳐 경제를 살리자’는 판에 박힌 담화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모순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相反相成)’하는 동양적 지혜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명박 정부도 화(禍)가 복이 되는 날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의 결단은 국민들이 ‘보기에 좋았다’고 할 때까지 귀를 열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는 일이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약력=한국외대 중국어과, 한국외대 정치학박사, 중국해양대학 초빙교수, 성균관대학 정외과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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