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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통폐합실상은이렇다>5.무너진 통폐합논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80년 신군부는 「건전언론 육성」이라는 미명아래 언론통폐합을단행했다.방송공영화.비리언론 척결.경쟁력 향상등을 통해 건전한언론환경을 조성한다는게 그들의 논리였다.
하지만 5공화국은 불과 6년여뒤인 87년 「6.29 선언」을통해 인쇄매체의 설립규제를 완화,불과 1년만에 신문사 수는 통폐합 이전수준으로 늘어났다.또 90년 6월 최병렬(崔秉烈)공보처장관이 민방 허용을 골자로 하는 「방송구조개편 안」을 발표,그해 11월 민간방송이 탄생했다.각각 대통령과 보안사령관으로서통폐합안을 최종 결재.집행했던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두 대통령이 재임기간중 방송공영화와 1도1사등 통폐합의 주요 원칙을 스스로 허문 것이다.
더구나 통폐합 조치이후 방송은 공영화가 아닌 권력의 시녀가 됐고,신문도 자율성을 잃으면서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했다.
특히 신문에 비해 방송의 폐해는 더욱 심했다.종교등 특수 방송을 제외하고 TV와 라디오등 모두 8개의 민간 채널이 KBS로 통폐합됐다.이에따라 우리 방송은 모두 공사화(公社化)가 된꼴이 됐다.
80년 강탈당했던 동양방송(TBC).동아방송(DBS)등은 날카롭고 객관적인 보도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나 통폐합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9시를 알려드립니다.땡-.전두환대통령은 오늘 오후 에 참석,관계자들을 격려한뒤….』 80년대 전반 방송뉴스의 첫 머리는거의 대통령 동정 기사로 채워졌다.웬만큼 큰 기사가 아니면 이원칙은 어김없이 지켜져 「땡全」이라는 유행어가 생기기도 했다.
뉴스가치도 왜곡됐다.
84년 모 방송 오후9시 뉴스에서 신민당 창당 발기인 대회 소식이 30초간 방영된데 이어 35㎝짜리 개구리가 나타났다는 뉴스는 40초간 방영됐다.
신문 역시 세간에서 「행간을 읽어라」「1단이 톱 기사」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철저한 보도통제 속에서 신음했다.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83년 봄 정치탄압에 항의하며 23일간 단식할 때신문들은 보일락말락한 크기로 「유력 정치인의 식 사문제」로 표현하는 웃지못할 일도 벌어졌다.
85년 2.12 총선이후 언론의 편파보도에 대한 반감이 행동으로 나타났다.그해 2월 신민당이 KBS.MBC 대표이사를 편파보도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것을 시작으로 86년 1월 종교계를 중심으로 시청료 거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통폐합 조치는 세계 언론환경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시대착오적 조치였다.80년대는 세계 언론의 격변기였다.선진국들이 다양화.민영화.미래화를 내걸고 곧 다가올 새로운 언론 환경에 대비하기위해 변화를 모색하는 시기였다.
〈표 참조 〉 우선 언론에 대한 정부 규제가 완화됐다.방송공영체제를 고집하던 프랑스.독일등 유럽 국가들마저 정보화 사회에적응하기 위해 민간 방송을 허용했다.이와함께 미국.일본등 세계각국의 뉴미디어 분야에 대한 발전도 눈부셨다.위성방송이 활성화되고 전자신문도 등장하는등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그러나 한국언론은 정부의 족쇄속에서 국민들을 「우물안의 개구리」로 만들었다.결국 한국언론의 암흑기로 기록될 5,6공의 통폐합논리는 국민저항과 세계 언론환경 변화라는 큰 파 도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이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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