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문학·의학으로 풀어본 피의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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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5리터
빌 헤이스 지음,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440쪽, 1만8000원

통합적 글쓰기의 좋은 모범이 되는 책이다.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소재를 유연하고 재미있게 풀어가는 솜씨가 대단하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흡입력이 있다. 과학과 문학이 만나고, 의학과 신화가 어울린다. 특히 저자 개인의 성장사를 요령 있게 비벼 넣었다. 저자와 독자의 거리감이 그만큼 줄어드는 느낌이다. 부제는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다. 앞의 역사는 피를 둘러싼 과학·의학사요, 뒤의 개인사는 동성애자인 저자의 이력서다. 역사와 개인의 접점을 찾아본 셈이다. 저자는 에이즈에 걸린 연인을 지켜보며 피를 둘러싼 무지와 오해, 그리고 과학의 발전을 정치하게 풀어 놓았다.

제목의 5리터는 우리 몸에 있는 피의 양이다. 물론 평균치다. 대략 5㎏쯤 나간다. 사실 요즘의 우리는 피의 정체·구성 등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질병 치유법의 하나로 몸에 있는 피를 강제로 빼는 ‘사혈법(瀉血法)’의 미국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192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로마시대 검투사들은 자기가 죽인 상대의 피를 마심으로써 상대가 지니고 있었던 힘과 용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도 했다. 지금 보면 우습지만 당시로선 일종의 ‘진실’이었다. 생리를 하는 여성에 대한 폄하와 부정적 인식이 사라진 것도 근자의 일일 뿐이다. 요즘 여학생들이 즐겨 인용하는 혈액형은 1901년 처음 발견됐다.

영화 얘기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스릴러의 대가 앨프리드 히치콕이 ‘사이코’를 흑백으로 찍은 것은 영화검열관이 피가 나오는 장면을 ‘가위질’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백혈구의 정체를 처음 밝혀낸 파울 에를리히의 일생은 1940년 할리우드에서 ‘에릴리히 박사의 마법탄환’이라는 멜로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인간면역 결핍 바이러스(HIV)로 오염된 피를 안고 살아가는 연인에 대한 저자의 관심과 보살핌도 생생하다. 우리 사회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불면증 환자였던 저자가 역시 잠과 꿈의 과학을 되짚어본 『불면증과의 동침』도 함께 번역됐다. 개인의 일상에서 시작된 문제의 외연을 넓게 인간과 세상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끌어낸 저자의 따듯한 마음이 인상적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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