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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과학 칼럼

비타민 - 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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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태초에 하느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빅뱅’(대폭발)을 통해 우주가 탄생되자마자 수억 분의 1초 만에 빛(방사선)이 탄생되었다. 먼저 소립자가 생기자마자 원자핵이 만들어져 분자를 형성하고, 이런 과정이 계속되어 지금과 같은 별(태양)들과 지구가 생기고 그 속에 우리 인류가 탄생하고 살아왔다.

40억 년 전 지구가 생성되었을 때 지각에는 많은 종류의 방사성 핵종을 함유하고 있었다. 이 중 반감기가 짧은 핵종은 모두 붕괴했고 현재 반감기가 1억 년 이상 되는 핵종과 그 자손들(딸 핵종)이 지각에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 인류는 방사선 속에 적응·생존·진화하면서 살아왔다. 예를 들어 세 사람이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다 하자. 그들은 장시간 땅과 우주로부터 방사선을 받고 공기 중 방사성물질(라돈 등)을 마시며 인체로부터 나오는 방사선을 서로 주고받게 된다. 중간에 미량의 방사성물질(K-40 등)이 들어있는 음식물을 방사성 핵종이 포함된 건축자재(Th-232 등)로 지어진 휴게소 안에서 먹을 것이다.

만일 어느 날 갑자기 방사선을 없애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인류가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질은 구조적으로 최고의 안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변신해 나가는 과정에서 방사선을 방출한다. 이때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나 분자로부터 전자를 빼앗거나 주기도 하여(전리작용) 인체에 활성산소를 만들어 영향을 준다. 다량의 방사선을 쪼이면 다량의 활성산소가 우리 세포핵의 DNA에 손상을 줘 암을 일으키거나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미량의 방사선을 주면 DNA에 손상이 일어나더라도 복구가 신속히 일어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DNA 복구기능이 활성화되면서 방사선과 유사한 외부 자극(세균 및 화학물질 침입 등)에 대한 적응반응이 강화되고, 노화를 방지하는 항산화 물질이 증강된다. 또한 손상된 세포의 자살기능이 활성화돼 인체를 보호하고, 면역기능이 활성화돼 외부 자극과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증강된다.

이러한 생체자극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독성 물질과 외부 자극은 용량이 적을 때 생체기능을 촉진하고 용량이 많으면 이를 억제한다(호르메시스=긍정적 자극효과). 예를 들면 스트레스가 많으면 병이 되지만 스트레스가 전혀 없이 하루 종일 TV만 보게 된다면 바보가 되거나 역시 병에 걸리게 될 것이다. 음주가 지나치면 병에 걸리지만 적당히 하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 현대의학은 이러한 이론에 근거해 각종 예방접종으로 전염병을 예방하고, 소량의 아스피린을 장기간 투여해 동맥경화증을 예방하고 있다. 방사선 역시 마찬가지임이 밝혀지고 있다. 적당량의 비타민이 필수적이듯 인류는 이미 물과 공기처럼 방사선 없는 환경에서 살 수 없다(비타민-R, Radiation).

한편 병원이나 원자력발전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근무 중 적은 방사선(저선량 방사선)을 일반인들보다 더 받게 되는데 과연 안전할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다른 지역보다 자연방사선이 10~50배 높은 인도 케랄라, 이란 람사르, 중국 양장 및 브라질 가리파리 지방에서 1970년 초부터 대대적인 역학조사가 시행돼 왔다. 특히 브라질의 가리파리 지방 해안은 방사성 물질이 풍부한 모나자이트 모래로 돼 있어 자연방사선 준위가 다른 지역보다 400배나 높은 50uGy/hr에 이른다.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는 예상을 뒤엎는 것으로 보인다. 즉, 다른 지역에 비해 방사선으로 인한 염색체 변이가 높은 데도 수명이 길거나 암 발생률이 낮다는 것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이제 저선량 방사선을 이용해 인체 면역기능을 강화하거나 수명을 연장하려는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제3의 불로 인류가 선물받은 원자력이 진시황이 그토록 구하던 불로장생의 길을 열어줄 수 있지 않을까? 원자력(방사선)을 이용해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원자력 의학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김종순 한국원자력의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