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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강1만리>26.사천성-시문학 巨峰 두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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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시성(詩聖)두보(杜甫)를 기리는 중국인들의 마음이 살아 숨쉬는곳이 사천성 성도(成都)다.
그가 타계한지 1,200여년이 흘렀지만 60평생에 단 4년 정도 머문 성도의 두보초당(杜甫草堂)은 지금도 그의 명성을 기리는 유적으로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한 여름 중국 3대 화로의 하나인 성도에 들 어갔지만 필자는 두보의 체취를 흠뻑 접할 수 있다는 흥분으로 오히려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성도 서남쪽 교외에 자리한 완화계(浣花溪).이곳에 두보는 초당을 짓고 집 둘레에 꽃과 나무를 심고 시냇가에 나가 고기를 낚으며 파란만장한 그의 삶에서 처음으로 안정되고 안락한 생활을영위했었다.상상만 해도 더위가 저만큼 물러났다.
그러나 정작 두보의 초당은 오늘날 「두보 기념관」으로 이름이바뀌고 대저택으로 탈바꿈했다.지난 61년 성(省)단위의 유적지에서 국가단위의 중요 문물 보호지가 되고 85년 기념관으로 명칭조차 바뀌면서 이곳은 중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비슷한 유형의 관광지로 단장되고 말았다.아마 현대 중국인들은 두보가 생애를 두고 부러워했던 「천만칸 집」(「茅屋爲秋風所破歌」)을 지어준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격세지감을 갖게 하는 두보의 고거이지만 그가 머물던 옛 자리에 드니 새삼 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두보(712~770)는 하남성(河南省)공현(鞏縣)에서 태어났다.그는 봉유수관(奉儒守官)집안에서 자라면서 『임금님을 요.순보다 더 훌륭한 분이 되시도록 보필하고 또 순화시켜 나가는데 이바지하리라』는 포부를 품고 전통사회의 여느 선비 나 마찬가지로 진사시험을 거쳐 관리로 출세할 생각이었다.그러나 24세 때낙양에서 응시한 진사시험에 낙방한 이후 줄곧 벼슬길이 순탄치 못했다.44세 때 발발한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계기로 그는 평생 간난고초의 유랑생활을 겪게 된다 .
이런 조건들이 결국 두보로 하여금 절실한 감정과 날카로운 비판을 바탕으로 한 감동적인 시편들을 써내게 하여 그가 천고의 대시인이 될 수 있도록 한 숙명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다.
20세에 만유를 시작한 두보는 30세에 낙양으로 돌아와 결혼했고 33세에 이백(李白)을 만나 친교를 맺었다.
35세에 장안으로 올라가 10년을 머무르면서 벼슬길을 찾았다.44세 되던 해 10월 가까스로 우위부주참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안녹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모처럼얻은 벼슬자리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난중(亂中)에 가족을 부주(지금의 陝西省)로 옮긴 두보는 홀로 영무에 있는 숙종(肅宗)의 행재소를 찾아가다가 반군에 붙들려 장안에 억류 되는 신세가되고 만다.
이 무렵 부주의 가족을 생각하며 지은 시가 바로 『이밤 부주에 뜬 달을 /아내는 홀로 바라보고 있겠지/…』의 「월야(月夜)」다. 이듬해 봄 적병이 점령중인 장안에서 두보는 「춘망(春望)」이란 제목의 시에 망국의 한을 담아 이렇게 노래했다.
『나라는 망했는데 산하는 예대로이고/성에 봄이 왔는데 초목만우거졌구나/시절을 느껴 꽃에도 눈물 뿌리고/이별에 한 맺혀 새보고 놀라네/봉화는 석달이나 타고 있는데/가족 소식은 귀하기가만금만 하네/흰 머리 긁을수록 짧아만 져서/ 비녀 하나 제대로가눌 수가 없네』(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천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끝내 장안을 탈출해 숙종 행재소에 당도한 두보는 그 충정과 열성이 인정되어 좌습유 벼슬을 제수받았다.그러나 48세에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촉도(蜀道)를 넘고 가릉강을 건너 성도에 이른다.
성도에 도착한 두보는 이듬해 49세 때 검남절도사 겸 성도윤(成都尹) 배면등의 주선으로 완화계에 집터를 얻어 초당을 짓고꿈같은 세월을 보냈다.이 시절 그는 「강촌(江村)」「촉상(蜀相)」「춘야희우(春夜喜雨)」「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 爲秋風所破歌)」등 240여 수의 시를 지었다.
성도의 풍요로운 세월도 잠깐,두보는 다시 54세 되던 5월 가족을 데리고 민강 줄기를 타고 가주(오늘의 樂山)를 거쳐 곧장 장강으로 빠져 중경.충현을 지나 운안(지금의 雲陽)에 당도했다.성도를 떠나 이곳까지 6개월간 그는 신병과 풍광에 시달렸다.밤배를 타고 강물 따라 동쪽으로 흘러오면서 자신의 신세를 『하늘과 땅 사이에 외로운 한 마리 갈매기』(「旅夜書懷」)에 비유하기도 했다.운안에서 겨울을 지낸 두보는 이듬해 늦봄 다시뱃길로 삶의 터를 기주(지금의 奉節 )로 옮겨 이곳에서 약 2년간 살았다.기주에서 두보는 400여수의 시를 남겼다.그의 시생애중 완숙한 사상과 풍작으로 한 획을 긋고 있다.
다시 기주를 떠난 두보는 강릉을 거쳐 악양에 이른다.지친 몸을 끌고 악양루에 올라 남긴 시가 유명한 「등악양루(登岳陽樓)」다. 중국인 남아로 태어나 만리장성을 오르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라 하듯이 시인인 두보에게는 동정호와 악양루가 「만리장성」이 아니었을까 싶다.그후 두보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길에 나선다.이때 그의 나이 59세.그러나 끝내 시인은 담주(지 금의 長沙)와 악주(岳陽)사이의 배 위에서 숨을 거둔다.
두보의 시가 오늘날 우리 곁에서 사랑받는 것은 그의 탁월한 시혼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그의 시구 가운데 『솟을대문 귀족집에는 술과 고기가 썩어나가는데/길에는 얼어죽은 사람의 뼈다귀가나딩구네」(「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는 당시 사 회의 부조리와전쟁의 참화를 묘사한 예다.또 『손 뒤집어 구름 만들고 손 엎어 비를 만드나니/사람들의 경박함을 무삼 셈하랴!』(「貧交行」)은 당시의 세태인정을 갈파한 것이다.『꽃 한 잎 나르면 봄 그만큼 사라지거늘/바람에 펄펄 만점 꽃잎 져 나르니 이를 어이하랴!』(「曲江」)에서는 시인의 섬세한 감각을 한껏 펼치고 있다.그리고 「茅屋爲秋風所破歌」는 스스로 어려운 처지임에도 오히려 남의 어려움을 아파하는 성인다운 마음을 나타낸 예다.
두보가 정녕 이런 시 정신을 지녔기에 사람들은 그를 시성이라서슴없이 부른다.또 장강을 거슬러 온 세상 사람들이 성도의 두보초당을 찾는 것이 아니겠는가.시인은 가도 시는 세월 속에 장강과 함께 흐른다.
▧ 다음회는 「사람의 몸보다 더 자유로운 인형극」편 입니다.
글=이병한(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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