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구름의 역사] 37. 신천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 필자가 문화부 기자 시절 인터뷰한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선생이 스페인에서 돌아왔을 때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일보의 왕초 장기영(張基榮) 사장은 "오케이! 좋은 데서 하세요"라며 쾌히 승낙했다.

그때 만남의 장소로 가장 인기 있었던 곳이 한국은행 건너편의 국제그릴이다. 가곡 '바우고개'의 작곡가 이흥렬(李興烈) 선생, 박태현(朴泰鉉).김대현(金大賢) 선생,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선생 등을 모시고 환영 좌담회를 열었다. 문화면을 크게 장식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 음악계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갈라져 있었는데, 내가 왜 한쪽 분들만 모셨을까.

안익태 선생은 솔직한 분이었다. 그는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기사가 나가자 음악계는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것으로 모든 국민으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분이라는 사실이 충분히 전달됐다고 생각했다.

말썽이 난 적도 있다. 이철혁(李喆爀)이라는 분이 영화 '춘향전'을 제작했을 때의 일이다. 조미령(趙美鈴)이 춘향역을 맡았다. '자유부인'에 출연했던 이민(李敏)이 이도령역을 했다. 반도호텔 건너편의 미 홍보국(USIS)에서 시사회를 열었다. 다 죽은 줄 알았더니, 한국 영화가 되살아나는가. 나는 을지로 입구의 원각사 뒤에 사는 이철혁씨를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커피를 내놓으며 응해주었다. 나는 문화면 전부를 그의 얘기로 메웠다. '한국 영화 가능성 있다'라는 큰 제목이 붙었다. 임창수(林昌洙) 편집국장이 나를 불렀다.

"이거 모두 선전해주는 기사라고 하는데 얼마 받았느냐고들 그래요…."

"맛있게 끓인 커피 한잔 대접해주더군요."

"앞으로는 다시 이런 식으로 오해받을 짓 하지 마세요."

그 뒤부터 한국 영화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한 서울을 재건하기 위해 땀 흘리며 온힘을 쏟고 있는 일반 시민과 마찬가지로 영화인들도 새롭게 기운을 내 전력투구하라는 염원이었다. 한국 영화계 대부 노릇을 하던 '춘향전'의 이규환(李奎煥) 감독은 커피 한잔도 사주지 않았다.

문화부 기자도 보람을 느낄 때가 더러 있구나. "오케이!" 가능성 없다는 분야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모든 친구들이여, 아쉽거든 나에게 오라! 실력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격려해 주겠다.

문화면에는 커트가 필요했다. 청주상업 후배로 서울대 미대를 나온 박노수(朴魯壽)의 그림을 자주 내주었다. 훗날 그는 국전(國展)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남정(濫丁)이 그의 호다. 강에 뜬 배를 특이하게 잘 그렸다. 속세를 초탈한 듯한 노인의 모습도 깊이를 느끼게 했다. 나는 예술인들에게 용기를 주는 데 쾌감을 느꼈다.

명동은 문화의 거리다. 시인.소설가.극작가.음악가.영화인 등 다 만날 수 있다. 얼큰하게 취해 양반걸음으로 어슬렁거리는 소설가 이봉구(李鳳九)씨는 명동의 상징으로 불렸다.

한운사 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