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공천권,누가 주인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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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해 우리는 과거청산 작업을 통해 우리 정치의 오랜 큰 암적 요소 하나를 타파하는데 성공했다.정치에는 으레 비자금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지만 관행이므로 묵인해야 한다는 「미신」이 통용돼 왔으나 노태우(盧泰愚)씨 비자금 사건은 그것이 더 이상 통할 수 없다는 확실한 자각과 교훈을 준 것이다. 비자금처럼 지금껏 관행으로 당연시돼 온 정치권의 또하나의 「미신」이 있다면 그것은 공천권일 것이다.공천권을 정당의보스가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묵인돼 오고 있지만 이제 그런 미신도 새로 검토하고 새로운 판단을 내 려야 한다. 누구나 말하다시피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정당의 주인은당원이다.국가의 모든 권력이 국민한테서 나오듯 정당의 모든 권력도 당원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언제부터인지 당원은 바지저고리고 모든 정당의 권력은 보스가 갖고 행사하고 있다.
당원이 100만명이든 200만명이든,소속 국회의원이 100명이든 50명이든 상관없이 모든 권력을 보스가 쥐고 있다.당원들은 보스가 잘 해도 따라가고 잘못 해도 지지한다.돈을 먹어도 지지하고 깨끗한 정치를 외쳐도 지지한다.과거사를 역사의 심판에맡기자고 해도 옳소 하고,지금 당장 과거청산을 합시다고 해도 박수친다.
공천권은 보스가 가진 가장 큰 권력이다.공천권을 통해 당원들을 새끼줄로 맨 돌맹이처럼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다.
보스의 공천이 곧 정치생명의 열쇠니까 보스가 잘하든 못하든 공천에 목이 매여 안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다시 총선의 계절을 맞아 공천권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다.새인물 영입이니 물갈이니,조직책 선정이니 하면서 공천작업이한창이다.정당마다 공천심사위원회니 공천 신청이니 하는 형식적 절차가 있지만 실제 누구를 어느 지역에 내보내느 냐의 최종결정권은 보스에게 있다.새로 발족한 개혁민주당을 빼곤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보스의 공천권 독점이야말로 정치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급소에 자리잡은 장애물이다.정당의 사당화(私黨化),언로(言路)경색 등의 현상이 모두 여기서 나온다.지역에 따라공천=당선이니까 사실상 의원을 임명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국민의선거권은 유명무실해진다.선거철이면 국민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이 정상인데 많은 지역에서 정치인들이 국민보다 보스에게 잘 보이려 하는 현상이 벌어진다.사실상 보스들이 국민 위에 있는 것이다.이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사당 이 형성되고,공천권을 통해 사당이 강화되고 다시 지역성이 강화되는 악순환이 벌써 몇번의 선거를 통해 계속되고 있다.
보스의 공천권 독점은 또 자기에 대한 충성을 가장 중요한 공천기준으로 삼게 됨으로써 개혁적 인물이나 자기권(圈)밖의 유능한 인물의 정치권 진입을 막게 되고 결과적으로 의원의 저질화,정치의 저질화를 가져온다.고참비서의 실력자化 현상 등에서 보듯측근정치의 발호도 가져온다.
결국 지역정치.사당화를 막자면 보스의 공천권을 제한.약화하는것이 급선무다.각정당이 이를 스스로 할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지금 어느 당도 그럴 용의나 태세가 돼 있지 않다.
방법은 명분과 여론의 압력을 통한 공천방식의 법제화뿐이다.우리 정당법과 선거법에도 정당의 후보추천은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이런 조문이 있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유명무실한 상태다.우리도 독일처럼 후보공천 을 지구당대회에서 비밀투표로 결정토록 강제하는 것이 한 방법이다.이것이 너무 급진적이라면 지구당대회가 복수추천하는 인물을 당지도부가 택일(擇一)토록 하거나,지도부 추천인물을 지구당대회가 최소한 동의토록 하는 절차라도 두어야 한다.
원칙적으로 공천권의 주인은 당원이다.당원에게 다 돌려줄 수는없더라도 당원이 참여할 수는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여야는 입으로만 정치개혁을 외칠 게 아니라 정말 우리 정치의고질을 다소나마 치료할 의지가 있다면 공천방식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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