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오바마와 미국의 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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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아직 전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당의 대선 후보로 지명받는 절차를 남겨놓고 있지만 최대의 라이벌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자신의 캠페인을 중단하고 오바마의 대선 승리를 위해 전력투구하겠다는 연설을 한 후 오바마의 후보 지명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오바마의 부상은 정치적 대사건이다. 케냐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흑인 유학생과 미국 남부 캔자스주 출신 백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오바마는 어려서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와 외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인도네시아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본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지만 케냐에 뿌리를 둔 부계 혈통은 이슬람교도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의 중간 이름은 ‘후세인’이다. 이처럼 인종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리고 자라온 환경에 있어서 ‘섞일 대로 섞인’ 그가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당선된 것이다.  

여전히 수많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 신음하는 미국의 흑인들에게 오바마의 등장은 엄청난 자부심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이제 자식들에게 “너만 열심히 하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며 오바마의 등장을 자축하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의 등장을 축하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흑인들만이 아니다. 예비선거 초반부터 그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계층은 오히려 흑인들보다 대학생들과 지식인층, 그리고 진보적인 백인 상류층이었다. 어째서인가?

그는 ‘변화’를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내세웠다. 초선 상원의원으로서 워싱턴 정가에서의 경력이 일천한 그는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정치적 압력단체가 전횡을 일삼고 정략적 타협과 관료적 타성에 찌든 워싱턴 정가를 개혁할 수 있는 적임자라며 자임하고 나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지지자들을 열광하게 하는 것은 그가 사람들 간의 편견의 벽을 허무는 소통의 달인이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예비선거 기간 중 가장 위기에 몰렸던 때는 그가 오랫동안 다니던 시카고의 한 흑인교회 담임목사가 과격한 ‘반미’ 발언을 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었을 때다. 오바마는 이때에 연설을 통해 한편으로는 그 담임목사의 발언 내용을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왜 미국의 흑인교회에서는 그러한 과격한 견해들이 유포되고 또 많은 흑인들이 그것을 믿게 되는지 백인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흑인들에게도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백인 중산층이 갖고 있는 불안감을 이해하라고 주문하였다. 선거가 자칫 인종 간의 갈등과 대결로 전락할 수 있는 위기를 그는 오히려 인종 간의 차원 높은 대화와 소통의 필요성을 미국민들에게 호소하는 기회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오바마의 부상은 미국의 대외 위상을 제고하는 데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무슬림 이민자들과의 인종적·종교적 갈등에 신음하고 있는 서구유럽은 오바마를 대선 후보로 선출하는 미국의 진취성과 저력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중동의 많은 사람 역시 오바마의 부상을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반기고 있다. 이슬람교도의 아들이 이슬람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탄의 국가’인 미국의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이들로 하여금 미국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은 현재 미국과의 관계 재정립을 위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가고 있다. 보다 차원 높은 한·미 관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국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가 요구된다. 오바마의 부상이 우리에게도 미국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함재봉 미국 랜드연구소 수석정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