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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파탄 나고 유혈 시위 … 정권까지 흔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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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 18면

굶주린 에티오피아인들이 국제적십자가 지원한 옥수수를 나르고 있다. 이곳에선 1984년 100만여 명이 기근으로 사망했다. 에티오피아 로이터=연합뉴스

“정치와 관계없는 식량 문제는 없다.”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이 내린 결론이다. 센은 기아 연구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잘못된 정치는 식량난을 낳고, 식량난은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정부에 정치적 위기를 몰고 온다. 식량위기로 지난 18개월간 아이티·카메룬·소말리아 등 30여 개 국가에서 유혈 시위가 발생했다.

식량위기 후폭풍에 시달리는 가난한 나라 22개국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달 ‘식량위기에 가장 취약한 22개국’ 명단을 발표했다. 22개국의 면면을 보면 식량 문제는 곧 정치 문제라는 게 확인된다. 국민의 30~75% 이상이 만성적 영양 부족 상태인 데다 쌀ㆍ밀ㆍ옥수수 등 주요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들이다. 게다가 석유를 전량 수입하기 때문에 국제유가 폭등으로 국가 재정은 파탄 상태에 빠졌다.

이들은 ‘실패한 국가(failed state)’이기도 하다.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실패한 국가’를 비효율적이고 약한 중앙정부가 국토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국가라고 정의했다. 식량 위기 22개국은 실패국가지수(FSI)도 높다.

식량위기 때문에 정부의 장악력이 약한 22개국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단적으로 짐바브웨와 아이티가 있다. 짐바브웨는 원래 식량 수출국이었으나 2001년부터 식량 원조를 받고 산다. 2004년 국민의 47%가 영양 부족이었다. 올해 작물 수확량은 국민의 4분의 1에게 제공될 분량에 그친다.

가뭄도 문제였지만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의 무질서하고 폭력적인 토지개혁이 식량난을 부채질했다.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백인 농장주에게 뺏은 농지 중 알짜배기는 고위 관료와 여당 정치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이티에서는 올 4월 자크-에두아르 알렉시스 총리가 해임됐다. 그는 식품가격 폭등이 부른 반정부 폭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알렉시스 총리는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았다. 상원은 “대책 발표가 늦은 데다 내용도 한참 부족하다”며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형편이 훨씬 나은 나라에서도 식량위기로 정치적 폭풍이 불 수 있다. 4월 말레이시아의 압둘라 바다위 총리도 사퇴 압력에 시달렸다. 기름값과 식품가격 폭등으로 39년 만에 처음으로 집권 정당연합인 국민전선(BN)이 안정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압둘라 총리를 후계자로 삼은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마저 그의 사퇴를 요구했다.

22개국은 식량위기뿐만 아니라 환경 변화에도 가장 취약한 나라들이다. 국제환경개발연구소(IIED)는 지난해 12월 ‘환경 변화에 가장 취약한 100개 국가’ 명단을 발표했다. 22개국 중 북한ㆍ타지키스탄ㆍ보츠와나를 제외한 19개국이 포함됐다.

장기적으로 봐도 22개국의 식량 문제는 암울하다.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IPCC)는 4월에 제4차 평가보고서를 발표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온도 상승이 곡물 생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현재 지표면의 평균 온도는 섭씨 14.5도다. 중위도(中緯度)와 고위도(高緯度) 지역에서는 섭씨 1~3도의 온도 상승은 곡물 증산에 오히려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중위도는 위도 20~50도에 있는 지역이며 고위도 지역은 남·북극에 가까운 지역이다.

보고서는 22개국 대부분이 속한 저위도 지역(적도와 남북 회귀선 사이의 지역)에서 섭씨 1~2도의 온도 상승이 있으면 부정적 결과를 낳을 것으로 전망했다. 22개국 중 아이티ㆍ캄보디아ㆍ북한ㆍ타지키스탄을 빼면 18개국은 아프리카에 있다. 아프리카는 사막화와 토양 악화가 심각하다. 최근 아프리카가 이룩한 연 평균 5% 경제성장률의 성과가 식량위기 때문에 증발할 수 있다.

제2의 녹색혁명이 ‘소리 없는 쓰나미(silent tsunami)’라는 식량위기의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1960년대 녹색혁명과 마찬가지로 제2의 녹색혁명도 결국 정부가 추진하는 것이다. 식량ㆍ환경ㆍ국가 위기라는 3각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주체는 역시 정부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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