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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歷史나무 가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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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과학시대의 눈으로 보면 모든 나라의 개국신화(開國神話)는 수상쩍은 대목 투성이다.단군(檀君)탄생 설화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실성보다 상징성을 취하고,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건국이념을기린다.역사의 나무는 신화의 안개 속에서 싹터 전설의 이슬을 머금고 자란다.
고작 200년 남짓한 역사를 가진 미국도 나라 세우고 굳히는데 역사교육이 한 몫을 한다.정직성의 귀감을 보이고자 어린 조지 워싱턴이 아버지의 꾸중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과나무를 벤 자신의 과오를 말했다는 일화가 만들어졌다.링컨대통령 이 어린시절책을 빌려 읽곤 하다 한번은 빌린 책을 비에 적셔 그 대가를 며칠 품값으로 치렀다는 것도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다.미국에는 마틴 루터 킹목사와 같은 위인들의 이름을 기념하는 공휴일이 있다. 미국대학에서 본받을 점은 우수한 교육시설과 교수진 못지 않게 암묵리에 애국심을 고취하는 분위기 연출이다.예컨대 프린스턴대의 본관인 나소홀(Nassau Hall)은 독립전쟁때 포탄피해도 입고 건국초기 대륙의회가 열리기도 한 유서깊 은 건물이다.이 건물 중앙 공간의 벽면에는 독립전쟁,1차.2차세계대전,한국전쟁 등에서 전사한 동문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정성껏 새겨져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유서깊은 대학들은 모두 이처럼 국가의 부름에 목숨으로 응한 이름들을 기리고 있다.
미국보다 20배이상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국은 국가적 위인을기념하는 공휴일 하루 없고,집안의 조상모시기를 위한 민속명절만있다.가문의식은 있으되 국가의식은 실종됐다.요즘 대학캠퍼스 곳곳에서 재야운동과 관련해 사망한 자를 기념하는 이른바 열사들의비석들을 발견할 수 있으나,한국전쟁 때 산화한 동문들의 이름을기리는 표지는 어느 대학,어느 구석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줄 안다.이것이 우연인가,고의인가.
광복 50년의 역사흐름 속에 국가존엄성에 흠이 되고 정부정통성에 의심이 가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그러나 국토분단과 전쟁을이겨내고 세계 어느나라보다 짧은 기간에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함으로써 반도 북쪽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 한 사실에 대해 우리는 이제 가슴을 펴고 세계인에게 개발 경험담을 나눠줄 수 있는 입장에 섰다.이같은 자랑스런 기록을 세우고도 스스로 움츠러드는 한국인의 자화상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물론 정치의 미성숙 때문일 것이다.이제야 한국은 그간경제성장의 토대위에 본격적으로 정치민주화와 부패척결의 단계에 들어섰다.혁명적으로 몰고가면 역사는 반전(反轉)하기 십상이지만점진적 진화로 다져나가면 역사는 뒷걸음질을 모 른다.모든 나라의 역사는 깨끗한 물과 혼탁한 물이 어우러져 흐름을 이룬다.맑은 물을 찾아 위화도회군(回軍)을 되돌릴 수 없다.
요즘 정치권의 비자금 태풍에 「12.12」와 「5.18」사건바람이 가세하면서 두 전직대통령이 구속되고 나머지 한사람마저 여론의 지탄대상으로 몰리고 있다.김영삼(金泳三)정부는 부박(浮薄)한 대중의 박수소리를 반기겠지만,세상에는 5 ,6공세력이 아니면서 마음불편한 국민이 다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김영삼정부는 정치권부패와 군사정변을 응징한다는 가상스런 목표를 추구하고 있지만,이것은 자칫 앞으로 집권자가 후계자에게 허물을 추궁당할까 두려워 장기집권을 꾀할 강력한 유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낸다.때가 되면 전직으로 바뀌는 현직은 마치유리집에 사는 셈이다.역사적 연속고리를 의식하는 사람은 돌던지기 게임의 위험을 알고 자제한다.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추락한 미국의 위신은 닉슨의 명예회복으로 회생했다.모든 전.현직대통령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치러진 닉슨의장례식은 사뭇 장중했다.한때의 오욕이 거대한 역사흐름에 세척됨을 보는 느낌이었다.
우리도 장점만 취하면 건국대통령을 비롯해 민주.경제건설.위기관리.단임(單任)실천.민정이양과도기.민주개혁 등의 대통령을 가질 수 있다.독재.우유부단.군사독재.부정축재 등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역사나무를 가꾸려면 가지치기 못지 않게 신화.설화.일화를 발굴.창작하는 밑거름주기가 필요하다.이제부터라도 나라세우기 작업을 제도화.지속화하기로 하자.
(서강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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