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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골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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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징어 짬뽕"
"난 콩나물국밥"
"빠가사리 매운탕"
"우거지 해장국"
"해물파전"
"으~ 해물파전…! 해물파전에 막걸리 한 잔… 아~ 아이원츄~~"

남들 보기엔 유치하지만 당사자들에게 절실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비 오는 날 먹고 싶은 음식 말하기.

영국에서 두 달 넘는 기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 동안 비가 오지 않은 날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차라리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라도 쏟아지면 낙뢰 위험을 핑계 삼아 그 날 골프를 접으련만 비가 쏟아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화창한 얼굴을 드러내는 하늘의 변덕에 우린 어쩔 수 없이 우비를 여미고 우중 골프를 감행해왔다. 정처없이 떠도는 길 위의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상, 더욱이 그 길이 영국의 하늘 아래 펼쳐져 있는 이상, 비와 맞짱 뜰 배짱 없이는 한 발짝 전진하기도 힘든 노릇이었기에 개의치 않고 일정을 밀어붙였다.

물의 도시 바스(Bath)로 향하던 길, 여지없이 먹구름이 하늘을 내리누르며 비를 뿌리고 있었다. 바스는 잉글랜드 남서부 끝자락에 위치한 소도시로 이름 그대로 물이 유명한 곳이다. 로마 식민지 시절에는 잘 나가는 '고대식 리조트'였다고 한다. 하여 그 도시엔 로마의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멀리 고속도로에서 바스의 실루엣이 보일 무렵부터 탄성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잉글랜드와는 전혀 다른, 마치 다른 나라에 들어온 듯한 느낌. 건축양식 자체가 로마풍이라 화려한 석조 건물들이 많이 등장했고 힐에 빼곡히 들어선 그림같은 집들이 눈부셨다.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우린 지체할 여유가 없어 바스 골프장으로 향했다. 그 골프장이 제발 높은 힐에 위치하길 기도했다. 골프와 시내 조망을 한 큐에 해결할 수 있도록….

1880년에 개장한 바스 골프장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만큼 충분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클럽하우스 옆에는 로마시대의 성곽이 유적으로 보전되어 있었고 코스 곳곳에 돌담이 길게 도열해 있었다. 홀을 거듭할수록 고도가 더해지면서 바스 시내의 깊은 속내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골프장에만 가면 더욱 심하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이상한 징크스 때문에 그 훤한 속내를 속속들이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슬쩍슬쩍 비춰지는 바스의 섹시함은 오히려 실체 그 이상을 상상하게 했다.

울타리처럼 로만식 돌담이 드리워진 10번 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특히 이 홀은 고도상으로도 가장 높은 곳이라 비바람의 영향이 대단히 컸다. 페어웨이의 굴곡은 필시 엠보싱 화장지의 확대판이었다. 어디 한 곳 스탠스가 편한 곳이 없었다.

전반적으로 곡선이 부드러운 골프장이었지만 만만치 않은 레이아웃이었고 비바람 때문에 스코어는 형편없었다. 드라이버가 150야드 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린에선 볼이 물에 떠서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바람 때문에 예리한 각도로 사방에서 들이치는 빗방울은 이미 우산의 기능을 무력화시켰다. 그립이 미끄러지고 비에 젖은 옷이 몸에 척척 감겼지만 꿋꿋하게 18홀을 마쳤다.

오후 5시에 시작한 골프였다. 경기를 마치고 나오니 밤 9시. 프로샵도 모두 퇴근해버리고 골프장에 인기척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었다.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을 락커룸은 고사하고 화장실마저 잠겨있었다. 잉글랜드 골프장의 낯선 풍경 중 하나다. 저녁 7시 정도만 되면 골프장 직원들이 죄다 퇴근 해버린다. 아직 플레이 중인 손님들은 자율적으로 플레이를 마치고 돌아간다. 같은 영국이라도 스코틀랜드 쪽 골프장의 경우는 펍이나 레스토랑이 다소 늦은 시간까지 손님을 받는데 잉글랜드 골프장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얄짤없이 닫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우중 라운드를 마치고 나면 한국 골프장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후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나와 뽀송뽀송해진 기분으로 돼지고기 송송 들어간 김치전골에 맥사 한 잔……. 아 옛날이여!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