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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이야기] 치료비 10억 2000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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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면

의료의 본질은 무엇일까. 허준에 익숙한 때문인지 우리에게 의료는 인술로 표현되는 봉사에 가깝다. 돈과 결부시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의료에 관한 한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다.

최근 건당 진료비론 사상 최고인 10억2000만원이 건강보험공단에 청구된 사건이 발생했다. 주인공은 혈우병을 앓고 있는 박모(3)군으로 지난해 4월부터 40일간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혈우병이란 혈액응고인자의 결핍으로 피가 굳지 않는 병이다. 당시 박군은 장이 꼬인 장중첩증으로 두 차례에 걸친 응급수술을 받았다. 다량의 혈액응고인자가 투여되지 않으면 수술시 출혈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문제는 박군이 혈액응고인자 8번과 9번이 동시에 결핍된 중증 혈우병 환자였다는 것이다. 이 경우 보통 혈우병 치료제인 혈액응고제(병당 80만원) 대신 고가의 신약인 '노보세븐'을 써야 했다.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수입해 쓰고 있는 노보세븐은 병당 640만원이나 되는 초고가 치료제다. 병원 측은 환자의 생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보세븐을 두 세 시간 간격으로 장기간 투여해야 했다고 밝히고 있다.

박군은 쾌유했다. 그리고 치료비 10억2000만원의 80%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지급하며 나머지 20%도 박군 가정이 월소득 300만원 이하의 가정이므로 희귀질환자 지원제도에 따라 보건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전액 부담한다. 환자의 부담은 일절 없는 셈이다. 박군으로선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건강보험제도가 없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생명을 살려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 건강보험제도가 만들어낸 작은 쾌거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다른 각도에서 고찰이 필요하다. 막대한 치료비를 누가 부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건강보험료가 됐든, 세금이 됐든 결국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간 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0억원이면 건강보험을 통해 10만명의 감기환자를 동시에 치료할 수 있는 돈이다. 매달 가구당 평균 5만원의 건강보험료를 내고 있음을 감안할 때 2만가구의 한달치 건강보험료가 한꺼번에 박군의 치료비로 쓰여졌다는 뜻이다. 만일 박군과 같은 사례가 10건, 100건 식으로 늘어간다면 그때도 똑같은 혜택을 베풀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한다.

현재 정부의 진료비 지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희귀질환은 혈우병을 비롯해 62개 질환이다. 그러나 이들 62개 이외 질환을 가진 환자들 중에서도 가정형편이 어렵고 생명이 위급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찌할 것인가.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비단 희귀질환 문제가 아니더라도 국민의 의료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와 더불어 건강 등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욕구가 대폭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 개발 등 공급자가 수요를 유도하는 측면도 있다. 예컨대 관절염의 경우 한알당 수십원짜리 진통소염제가 있는가 하면 한병당 770만원이나 하는 초고가 연골주사 치료제도 있다. 누구나 적은 돈을 내고 좋은 치료를 받길 원할 것이다. 그러나 건강보험 재정 등 의료자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기자는 의료의 본질이 돈이라고 믿는다. 수요자와 공급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대의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돈은 속성상 효율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가능하면 적은 돈으로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OECD 국가중 예방백신 무료접종이 실시되지 않는 몇 안 되는 국가가 바로 우리나라다. 비용대비 효과가 큰 국가 차원의 보건교육이나 계몽사업도 전무한 실정이다. 현재 건강하다는 이유만으로 건강보험료를 꼬박꼬박 내고 있는 말 없는 다수의 건강이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라. 박군처럼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율배반적이지만 다수의 보통 사람이 더욱 건강해야 보험재정을 아낄 수 있고 그 돈으로 소외계층의 지원도 확대할 수 있다는 자본의 선순환 논리를 보건당국이 이해해 달라는 뜻이다.

홍혜걸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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