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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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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사계 중에 결이 곱기는 봄이 으뜸이다. 탄핵이다 뭐다 해서 인간들의 새된 소리들만 온 나라를 뒤덮고 있는 듯해도 이미 어느 벌판, 어느 골짜기마다 싹이 트고, 꽃들이 벙글고 있음에랴.

마음이 갇혀 있으면 봄도 볼 수 없으려니…, 에라 기왕 생각난 김에 국립수목원이라도 찾아가 보자. 시간 반이 족히 걸려 도착하니 광릉 숲 속에 자리잡은 수목원은 거대한 고요 그 자체다. 그런데 뭔가 좀 휑하다. 양지 바른 곳에 선 산수유와 복수초만 앙증스러운 꽃을 피웠을 뿐 이리저리 둘러봐도 숱한 이름표만 눈에 들어온다.

"이곳만 해도 숲 속이라 도시 주변과는 사뭇 달라요. 당연히 꽃피는 것도 더디죠."

어느새 나왔는지 이유미(李惟美.42.여) 박사가 설명을 해준다. 이곳에서 10년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서울대 임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식물분류학을 전공한 농학박사. 특히 연구 등 본업(?)외에 수시로 강연이나 글쓰기 작업을 통해 우리 나무와 우리 꽃에 대한 전도사 역할을 꾸준히 해오고 있어 과학자치곤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사실 이번에 이곳을 찾은 것도 그녀한테 나무와 꽃 얘기를 듣고 파서 나선 길.

-가장 좋아하는 식물은.

"제게는 가장 곤혹스러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종 하나 하나마다 몸과 시간을 들여 만나고, 얘기를 나누고 하면서 맺은 인연이거든요.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있겠습니까."

-그래도 봄꽃 중에 한 가지 꼽는다면.

"제비꽃이죠. 하잘것없어 보이지만 꽃이 얼마나 예뻐요. 거기다 가짓수가 64종이나 될 정도로 다양한 생태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공부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녀에게 봄은 남다른 의미다. 완상보다는 행동하는 공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꽃이 피기 시작하면 한달 중 절반 이상을 산이야 들이야 쏘다니느라 바쁘기 짝이 없다. 주요 업무 중 하나가 희귀식물의 보존이다 보니 자생지를 찾아 조사하고, 때론 증식을 통해 복원해야 하는데 해당 식물을 찾는 데 꽃만큼 좋은 '안내'가 없는 때문이다.

DMZ를 비롯해 전국의 오지란 오지는 죄다 서너 번씩 훑었다. 그녀는 세계적으로 희귀종인 가시연꽃을 찾기 위해 전국 200여 곳의 늪을 뒤지기도 하고, 한계령풀의 군락지를 찾아 점봉산에 갔다가 때마침 비가 내리는 바람에 길을 잃고 하루종일 헤매다 간신히 내려오기도 했다. 또 특산 여부를 놓고 논란이 많았던 왕자귀나무가 목포 유달산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혼자 갔다가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하던 참에 꽃향기를 쫓은 끝에 찾아내는 행운을 맛보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자생식물은 대략 4000여 가지(나무 1000여 가지, 풀 3000여 가지). 그녀가 이들에 대해 뜨르르 꿸 수 있게 된 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얻은 '당연한' 결과다.

"언제 어디서든 달력만 보면 어느 골짜기에 어떤 식물이 자라고 있는 모습이 지금도 컬러 영상으로 떠오르곤 합니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죠."

그런 그녀가 최근 전국의 동료 전문가들과 함께 큰 일을 해냈다. 40명이 2001년부터 매달려 총 199과 4844종에 대한 식물명 표준화 작업을 마무리한 것. 예를 들어 그동안 '곰솔' '해송' '흑송' 등으로 불리던 것을 '곰솔'로, '개불알꽃' '복주머니꽃' '요강꽃' '작란화''포대작란화' 등은 '복주머니란'으로, '갯무' '무시''무아재비' '무우' '무' 등은 '무'로 쓰도록 했다.

"이번 작업의 의의는 자원이란 측면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이용하는 데 가장 필수적이면서도 기초적인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같은 식물을 두고 이름이 달라 다른 식물로 오해하는 바람에 중복과 혼동이 빚어졌는데 이제 늦게나마 그런 장애를 없앤 겁니다."

식물명 표준화 작업과 함께 그녀가 신경을 쓰는 건 식물의 보존과 연구에 필수적인 기준표본과 종자를 확보하는 일. 지난해부터 운영 중인 표본관엔 현재 10만점을 보유하고 있으나 미국의 뉴욕식물원 표본관이나 하버드대 표준관, 일본 도쿄대 표본관, 러시아의 코아브르 표본관, 영국 큐가든식물원 표본관 등에 비해선 턱도 없는 수준이고 올해부터 운영에 들어간 종자은행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앞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수집활동을 벌여 세계적인 기관으로 만드는 게 그녀의 소망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녀의 '식물 사랑'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 같은 무용담을 들을 수 있을까.

"학자들의 경우 식물을 연구대상으로만 보기 쉬운데 전 그렇지를 못해요. 새순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이름만 들어도 즐거워지거든요. 늘 기쁨으로 대하다 보니 이젠 서로 감정이 통하는 걸 느껴요."

그녀가 이렇게 '도'가 트게 된 건 1995년 초 '우리나무 백가지'를 펴내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 때문. 92년 박사가 되면서 착수해 3년 동안 한 순간도 나무란 존재를 머리에서 비운 적이 없다. 우리네 생활이나 문화적으로 밀접한 소나무.대나무.매화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곤 자료가 거의 없는 데다 그나마 있다 해도 서너 마디의 간단한 학술적 표현 정도라 고심이 더했다. 그 결과 책이 나올 무렵이 되니 어떤 나무를 보든 자신의 일부분으로 느껴지더란다.

사실 서울 토박이인 그녀가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 품에서 자랐다는 것 말고는 식물과 남다른 인연은 없었던 터. 대학 전공도 원래 미술이나 건축을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원 만드는 일쯤으로 여기고 시작한 식물공부 덕분에 동기동창인 남편(42.농학박사.국립환경연구원 연구관)도 만나게 됐고 이름도 얻었으니 어차피 그녀와 식물은 찰떡궁합인 셈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야생화' '쉽게 찾는 우리 나무' '한국의 천연기념물' '우린 숲으로 간다' 등 다수의 저서와 수십편의 논문이 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소중히 아끼고 사랑해야 돼요. 정서적.환경적 측면뿐만 아니라 당장 자원으로서 우리의 실존과 관계된 경쟁력이잖아요. 먹고 병 고치고 하는 거, 알고 보면 식물 속에 다 있어요."

수더분한 모습으로 끝까지 식물 사랑을 역설하는 그녀-. 야생초를 닮았다.

글=이만훈 사회전문기자
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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