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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곤소곤 연예가] 김제동 흉터 두개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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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면

점(占) 보러 가면 이런 말 꼭 한다. '어릴 적 크게 앓은 적 있지?' 의외로 잔병치레 한번 안 했을 것 같은 건강청년 김제동이 유년의 아픈 기억 한 조각을 꺼내주었다.

때는 네살 무렵. 5녀 1남 중 막내아들인 금지옥엽 제동에게 어머니는 쇠고기 듬뿍 넣어 국을 끓어주셨다. 그런데 그만 뜨거운 국그릇이 밥상을 제쳐두고 제동의 등으로 엎어지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아직도 그의 등에는 고깃국에 데인 상처가 문신처럼 남아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이날의 충격을 계기로 그는 고기와의 인연을 끊고 본의 아니게 유기농 식생활을 시작하는데….

"지금도 기름진 삼겹살보다 된장찌개를, 싱싱한 횟감 대신 풋풋한 쌈밥을 더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고기 안 먹으면 도대체 뭐 먹고 사느냐고 하는데 그것 빼고도 얼마나 맛있는 것 많은데요? 김치.두부.콩.제철 과일…."

그러고 보니 그의 구수한 웃음과 맛깔스러운 입담도 제 식성을 닮아 신선하고 담백한가 보다. 아무튼 이것이 하루아침에 그의 평생 입맛을 바꾼 대대적인 사건이었다면 인생을 뒤바꾼 엄청난 사건도 있었단다.

그 후로 딱 5년 뒤. 어린 제동은 아홉살 인생 이래 최고의 위기를 맞게 된다. 볕 좋은 어느날, 나무 그늘 아래 소 풀 뜯기며 망중한을 즐기던 그때 장난기 많은 친구가 다가와 우산으로 그의 무릎을 쿡 찔렀다. 순간 피가 났지만 남자가 이 정도쯤에 눈물을 보일 수는 없는 일. 그러나 며칠 뒤 그는 펄펄 끓는 고열로 쓰러지고 말았다.

" 그냥 감기인 줄 알았죠. 그런데 다리가 너무 부어 걸을 수가 없더라고요. 동네 병원에 갔더니 다리를 절단해야 된다고…."

심한 파상풍이었다. 곧바로 대구로 올라가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는 '맑은 날씨에 녹슨 우산에 찔린 네가 억수로 운이 나빴다'는 위로의 말을 남긴 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시고 병 간호는 외숙모의 몫이 됐다. 다행히 수술해야 하는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무려 6개월이나 학교도 가지 못했던 그 시절 그때, 어린이 위인전만이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이때부터 제동의 행복한 책읽기가 시작됐다. 을지문덕.강감찬.연개소문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고 아픈 다리의 상처도 잊게 할 만큼 건강한 마음을 갖게 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즐거운 읽기 습관은 계속됐고, 아직도 아침마다 공복에 신문 서너 개는 꼭 봐야 한다고. 이것이 바로 짧은 순간에도 깊이있는 철학까지 담아내는 김제동표 화술의 밑거름이었다. 위기는 '위험하지만 기회'를 뜻한다는 것처럼, 녹슨 우산 사건의 위기를 최고의 진행자가 될 수 있는 기회로 바꾼 어린 제동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의 오른쪽 무릎에는 지금도 선명한 동그란 우산코 자국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보기 흉한 흉터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만큼은 활자가 주는 인생의 지혜를, 돌봐주셨던 외숙모님의 깊은 사랑을 알게 한 영광의 상처다.

이현주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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