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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해온 바웬사波大選 패배-교황權威 흔들리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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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세계 가톨릭교회 수위권자(首位權者)며 우리시대의 탁월한 영적지도자인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지엄한 권위가 최근 잇따라상처를 입고 있다.상처의 하나는 그가 열렬히 지지해온 바웬사 폴란드대통령의 대선 패배다.또 하나는 바웬사 낙선 1주일만인 지난달 25일 아일랜드에서 가결된 이혼 합법화 개헌안이다.이 두가지 사례는 교리적으론 예수그리스도의 으뜸 사도 성(聖)베드로의 후계자로,직무상으론 순명(順命)의 의무가 지워지는 막강한교도권자(敎導權者)로 가톨릭 국 가들에 대해 행사해온 교황의 종교적.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흠집낸 상처가 아닐수 없다.
특히 두나라 모두 가톨릭국가일뿐만 아니라 폴란드는 교황의 모국으로 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바웬사의 낙선은 곧 교황의 정치적 패배를 의미한다.아일랜드의이혼 합법화는 바오로2세가 거듭 강조해온 생명문화(生命文化)의중요 내용인 이혼과 낙태금지에 대한 불복종으로 신앙상.교리상의중대 문제가 될 수 있다.
교황의 장엄 교도권에 절대적인 「무오류권(無誤謬權)」을 인정해온 가톨릭의 전통으로 볼때 신자의 이혼 합법화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오래전부터 조국 폴란드의 바웬사 자유노조를 정신적으로 적극 후원해왔다.폴란드 크라코프 대주교였던 보이틸라 추기경은 78년 콘클라베(교황선출회의)에서 교황으로 선출돼 요한 바오로2세라는 교황명(敎皇名)으로 착 좌한지 8개월만인 79년6월 공산치하의 모국 폴란드를 첫 방문했다.
첫방문에서 조국의 자유화 의지를 새삼 다진 그가 바웬사를 처음 직접 만난 것은 81년1월 로마교황청 접견실에서였다.
교황은 폴란드 자유노조연대 대표단을 이끌고 로마를 찾은 바웬사를 두번이나 접견하며 폭넓은 대화를 나누었다.
두번째 모국 방문(83년6월)때는 공산당 강경론자들의 압력을끝내 물리치고 자신이 주교시절 즐겨 스키를 타던 곳인 타트리산계곡 별장에서 자유노조 지도자 바웬사를 만났다.
교황의 자유노조 지지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후 폴란드 대통령 선거에서 바웬사를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교황의 후원이 여전했음에도 이번 선거에서는 패배하고 말았다. 「자유의 철학자」「놀라운 교황」등의 별명을 가진 교황 바오로2세는 종교 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국제정치가로,사상가로,시인으로 세계적인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특히 고르바초프.바웬사와 함께 89년 동구 공산권의 몰락을 가져온 3대 주역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또 이념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처음 지지한 교황으로 주목을 모으기도 했다.그의 경제적 가르침은 회칙(回勅)『100주년』등에서강조하고 있는 「인간의 경제적 창의성」 존중으로 대변된다.
가톨릭 노동헌장인 교황 레오3세의 회칙 『새로운사태』 반포 100주년을 기념해 91년 반포한 바오로2세의 회칙은 「1989년」이라는 제목을 붙인 장(章)을 통해 지식인들의 반자본주의경향을 극복하는데 기여하는등 많은 새로운 사회사 상들을 담았다. 이같은 교황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최근들어 교계 내외에서 교황에 대한 도전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특히 이번 폴란드와 아일랜드의 사례는 진보적인 교회내 사제들의 불복종 사례들과 겹치면서 교황의 권위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런가운데 교황은 지난달 25일 교회 지도자들에게 낙태.피임금지등 교회의 공식교리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지 말 것을 새삼 강조했다. 교황 바오로2세의 권위와 지도력이 「교황의 권위는 인정하되 절대적 복종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풍랑속에서 또다시 어떤 파도를 만날지 자못 관심사가 아닐수 없다.
이헌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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