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 시대착오를 어쩌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5호 09면

직장 다닐 때 얘기다. 동료건 상사건 남자들은 마음에 안 드는 여자에게 “이 아줌마가!”라며 최후의 일격을 가하듯 고함을 쳤다. 아줌마라는 게 그렇게 기분 나빠해야 할 호칭인가 처음엔 헷갈리기도 했지만, 못난 남자들이 비열한 표정으로 쏘아댄 뒤 통쾌해할 때 그 말엔 이런 뜻이 담겨 있다는 걸 안다. ‘아무리 잘난 척해 봐야 결혼한 여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나 같은 남자와는 차원이 다른 저열한 족속밖에 안 되면서!’

이윤정의 TV 뒤집기

가사노동의 가치가 얼마네, 가정의 CEO네 해도 여자들이 ‘아줌마’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기 힘든 건 사람들이 그런 시선으로 ‘아줌마’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구나 꿈이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남편·자식 거둬 먹이고 입히고 하는 본능적인 일과 그것에 연관된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동질적인 인간들.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새롭게 선보인 코너 ‘세바퀴’를 보다 예의 그 “이 아줌마가!”라고 불릴 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전통의 오락프로가 내놓은 새 포맷은 아줌마 연예인 열댓 명을 앉혀놓고 퀴즈를 풀면서 수다를 떠는 것이다. 이른바 ‘줌마렐라’형 드라마도 뜨고 ‘해피투게더’에서 아줌마식 찜질방 토크가 인기를 얻으면서 아줌마 파워가 부상한 것에 발맞춘 쇼인 듯했다.

문제는 역시 ‘아줌마’에 대한 이 사회의 일반적 시각이다.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는 인기인들을 모아놓고도 이 쇼는 딱 전형적으로 이들을 ‘동네 아줌마들’ 우습게 다루듯 한다. 퀴즈를 풀 땐 밥주걱을 들게 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동(洞) 이름을 외치게 한다. 아예 호칭을 ‘xx댁’이라 안 하는 게 다행이지 싶었다.

꽁치와 고등어를 구분할 줄 아느냐, 다음 상품의 마트 가격은 얼마냐, 다음 장면의 요리는 무슨 음식이냐 하는 문제만 푸는 모습을 보면서도 설마 ‘세상을 바꾸는 퀴즈’라는 거창한 부제가 붙었는데 싶어서 계속 봤지만 이 프로,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데 싶은 헛발질만 계속했다.

퀴즈보다는 아줌마들의 걸쭉한 막말에 은근히 기대를 거는 듯 선우용녀나 이경실의 과격발언을 돋보이게 하더니,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결승 주부 3종 경기라며 김밥 싸기, 바늘에 실 꿰기·넥타이 매기 등을 누가 빨리 하나 겨루는 것이었다. 이게 20년 전통의 주말 버라이어티 쇼에서 21세기에 주부 스타들을 모아놓고 할 수 있는 최선이었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늘 도도하고 청아한 목소리로 우리를 매혹시켰던 가수 양희은이 김밥 싸고 바늘 귀 꿰는 모습을 보며, 농구코트의 여왕 정은순과 올림픽의 영웅 현정화가 시장 물건 값을 놓고 목소리 높여 싸우는 모습을 보며 우리와 다르지 않은 스타의 또 다른 소박함을 발견하는 기회여서 좋았다고,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 같은 아줌마는 좀 서글펐다.

뭐 남자들의 시선이 결국은 틀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싶어서. 아무리 저렇게 자기 분야에서 잘나고 똑똑한 여자들도 다 별 수 없이 저런 ‘아줌마스러움’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슷한 부류의 존재들이라는 걸 이렇게 확인시켜주니 말이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그래서 집에만 있던 아줌마들도 유모차를 끌고 나와 집회의 앞줄에서 대중을 리드하며 세상을 바꿔나가는 ‘아줌마 카리스마’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전문직 여성’들을 데려다 놓고 여전히 밥 잘하고, 바느질 잘하고, 남편 잘 입히는 사람으로 아줌마를 그리고 싶어하는 이 쇼의 시대착오는 제발, 개선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