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지리산서 소리공부 三昧境 안숙선 명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영화『서편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남매 상봉 대목이다.
죽은 의붓아비를 그리며 소리로 한을 푸는 그 장면을 보며 눈물짓지 않은 이가 없었다.그 소리의 주인공이 배우 오정해가 아니라 안숙선(47)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풍진 삶의뒤안을 풀어내려면 중년 소리꾼 안숙선의 소리가 아니고서는 될 일이 아닐 터이다.겨울이 찾아든 판소리의 모궁(母宮)지리산.화엄사에서 산길 10리인 연기암 일맥당에서 安씨가 소리연습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불현듯 소리꾼의 산중 공부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증이 일었다.기자를 반긴 것은 먼저 소리였다.일맥당의 작은 방「녹야원(鹿野苑)」의 닫힌 문 너머에서『춘향가』 한 대목이 울려퍼지고 있었다.사슴이 노는 동산,安씨의 미태(媚態)어린 조그만 몸과 얼굴이 꽃사슴을 많이 닮았다.
겨울산의 오후 해는 짧다.사진기자의 재촉에 安씨는 재빨리 화장을 하고 나섰다.『한자락 할까요』하더니 이내 『갈까부다,갈까부다.임따라서 갈까부다.바람도 수여넘고…』하는,춘향이 서울간 이도령을 그리워 우는 대목이 흘러나온다.
고즈넉한 산사의 뒷산에서 이 애잔한 계면조(界面調)의 중모리를 듣노라니,과장컨대 지리산의 뭇생명들이 만파식음(萬波息音)의위안을 받는듯 싶었다.모쪼록 그 소리가 교도소의 全.盧씨에게도들어가 그들의 심저를 일깨워줬으면 하는 싱거운 생각이 든다.연기암 거처는 구례의 시조모님이 주선했다.구례 노인위문공연을 해준 답례다.
-바쁘기로 소문난 국악계 프리마돈나가 어인 일로 이 산 속에들어와 있습니까.
『삼성나이세스 전속 첫 음반을 연말께 낼 예정인데 그것 준비도 하고,소리연습도 하고,또 좀 쉴 생각에 내려왔어요.공연 스케줄로 봐선 서울에 있어야 하는데 그곳 분위기가 도무지 어수선한 게 무슨 공해같았어요.여기(11월5일 내려와 12월1일 상경)와서도 대여섯차례 공연외출을 했으니 사실 들락날락한 셈이지요.』 삼성나이세스는 지난5월 소프라노 조수미에 이어 두번째로安씨와 전속을 맺었다.향후 3년간 CD 20장 분량의 판소리 다섯바탕을 낼 계획이다.
-들락날락하면서도 공부가 잘 됩니까(安씨는 사정이 되는 한 웬만한 출연.인터뷰요청은 다 응한다.국악,특히 판소리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미흡해 우리소리를 알리기 위해서다).
『마음먹기에 달렸어요.여기 하루가 서울 열흘보다 더 좋아요.
생각같아서는 삭발하고 한 몇년 머물며 소리공부나 실컷 했으면 좋겠는데 지금 이 나이가 한창 무대에 설 때라 아쉬워요.활동하는 건 좋은데 듣는 사람 질력 안나도록 하는 게 최대과제고 그러려면 가끔 지리산 어디 쯤으로 숨는 게 좋아요.』 -지리산의어떤 점이 좋습니까.
『지리산은 삐죽삐죽 하지 않고 깊고도 넉넉해요.사람이 접하기쉽고 사람을 감싸주는 산이지요.계곡.폭포도 큰 것같지만 사실 아기자기해요.그 속에서 노래하면 자연과 내가 하나되는 기분을 느껴요.그러니 꾀를 못부리지요.사람들 앞에서 노 래할 땐 꾀를낼 때가 있어요.그런데 판소리에서 겉치레 발성이 시작되면 소리고 사람이고 다 죽습니다.소리공부하며 산을 찾는건 그런 꾀를 내는 마음을 버리려는거지요.지리산은 또 판소리의 고향이고 내 고향은 남원이잖아요.』 安씨는 아홉살때 판소리에 입문했다.외가가 예인 쪽이었다.7년간 동편제의 명창 강도근을 사사했다.그후김소희.박귀희 문하에 들어갔다.천부적 재질은 둘째치고 스승운이고됐으나 행복한 편이다.
판소리를 굳이 영어로 번역하면 「원 맨 오페라」쯤 된다.소리꾼은 사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여러가지 목소리를 구사하고 발림.표정연기도 곁들인다.여기서 꾀를 낸다는 것은 관객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얍삽한 「노랑목」을 내거나 등 장인물마다의음색을 내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이다.피를 토하는 수련 끝에 쉰듯 맑게 튀어나오는 수리성.청구성,방울져 구르는 방울목이 최고의 소리다.
-전문가들도 그렇게 어려운데 일반인들이 소리를 배우겠습니까.
『판소리는 「춘향전」이나 「심청전」을 극음악으로 만들어 관객과 대화하며 노는 것입니다.전문가라도 8시간이나 걸리는 「춘향가」를 완창하기는 어려워요.일반인들은 우선 대중가요려니 생각하고 사랑가나 쑥대머리 한 대목쯤 외워두고 흥얼거리 면 판소리의흥이 마음에 와닿고 몸에 배게 됩니다.어렵지도 않아요.어린이들에게 가르쳐보면 금방 따라해요.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든 가능합니다.』 -흥은 그렇더라도 가사전달이 또 문제인데요.한문이 많고. 『중학생들이 처음 영어노래 배울 때 가사를 모르고도 얼마든지 즐깁니다.판소리도 마찬가지예요.그러나 정확한 가사전달이 숙제이기는 해요.통성으로 부르고 한 단어를 대부분 붙여 부르는것,예를 들어 「금강산…」할 때 「금」자를 늘이지 않고 「산」자를 늘여 부르는 게 정확하게 가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요.그런데 판소리는 문학적 요소가 강합니다.듣기 전에 가사를 읽어두면 듣는 맛이 배가되요.』 -가끔 득음(得音)의 경지를 느낍니까. 『어쩌다 한번씩 찾아와요.전율을 동반한 희열의 순간이지요.다른 예술.직업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맛에 소리합니다.완전한 경지엔 죽어도 못갈 것같아요.그러니 공부할 밖에요.』 安씨는 성격이 맑고 농도 잘한다.소리하는 사람들은 한이 많다던데 본인도 그러냐는 물음에 기자는 그렇지 않느냐는 되물음으로 대신했다.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를 중도에 그만뒀다.물론지금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산사에서 멀리 저녁놀을 받으며 굽이져 흐르는 섬진강과 그 옆에 불빛을 하나둘 밝히고 있는구례읍내의 모습이 계면조의 한 대목을 떠오르게 했다.
대담=이헌익 문화부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