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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클래식은 과대평가” 매니어의 독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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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89)이 지휘하는 모습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아함과 카리스마를 본다. 하지만 저자는 카라얀의 춤추는 듯한 손짓과 움직임을 “음악적 내용이 없는 클래식 연주자들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쓰는 수단”이라고 정의한다.

굿바이 클래식
조우석 지음, 동아시아, 312쪽, 1만5000원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에 대한 많은 정보를 모은다. 그녀의 아름다운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우아한 모습과 내면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기도 여러 번. 남들이 무모하다고 해도 수입의 대부분을 이 여성에게 바쳤다.

문제는 이 남성이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할까”라는 의문을 품으면서 시작됐다. 잘 생각해 보니 이유가 없더라는 것이다. 후광이 비치는 듯 아름다웠던 모습은 가만히 보니 실체 없는 화장기에 불과했다. 신비로워 보일 정도로 말을 아끼던 도도한 그녀가 실은 말에 담을 콘텐트 빈곤에 허덕이는 ‘된장녀’였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알게 됐다. 잘 모르고 그녀를 우상화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성은 결론 내린다.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나의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저자의 ‘그녀’는 서양의 클래식 음악이다. 그는 클래식 매니어였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 클래식에 빠지기 시작해 프란츠 리스트 이후 피아니스트의 계보를 줄줄 외고 웬만한 음반은 모두 그러모았다. 일간지 문화부에서 근무하며 ‘문화통’으로도 불렸다. 그러다 40대 중반을 넘어 재즈에 마음을 빼앗겼다. 엔리코 라바의 재즈 트럼펫 연주는 아찔할 정도로 솔직했다. 클래식 음악의 ‘이유 모를 도도함’이 가식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한다. “클래식을 ‘아직’ 잘 몰라서 어렵다.” “클래식에는 그래도 ‘무언가’ 훌륭한 게 있겠지.” 이런 말을 하는 클래식 공포증 환자가 주된 표적이다. 저자는 ‘아직’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클래식은 대중 곁으로 다가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무언가’ 훌륭하다는 것은 수 백년 동안 한국인을 세뇌시킨 서구 예찬론에 불과하다고도 말한다.

저자의 ‘첫사랑’ 클래식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모차르트·베토벤은 충만한 영감에 못 이겨 일필휘지로 악보를 채운 천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범재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악보를 누더기로 만들었다. 또 애잔하기로 유명한 슈베르트의 멜로디는 ‘슬퍼하되 상할 정도라면 안 된다’(哀而不傷)는 공자의 말을 어긴 신파조다. 난해한 실험을 반복하다가 대중의 차가운 마음만 확인한 현대음악은 말할 것도 없이 음악의 기본을 어겼다.

클래식은 또 청중을 객석에 ‘찌그러뜨려’ 놓고 박수도 아무 때나 치지 못하게 한다. 청중과 연주자가 어우러져서 한바탕 노는 월드뮤직과 적수가 못 된다. 재즈의 섹시함도 없고 탱고의 흥겨움도 없다. 저자는 “문화의 다원주의가 힘을 얻으면서 클래식 음악은 자연사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 책은 ‘클래식은 죽었다’라는 제목으로 문화예술 웹진 ‘ABC 페이퍼’에 지난해 연재됐던 글을 묶어 다듬은 것이다. 당시 연재는 음악계에서 꽤 화제가 됐다. 일부는 썰렁한 클래식 공연장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래식 공연장에서 악장 사이에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눈총 받아본 사람들은 통쾌함을 느꼈다.

반대로 꼭 ‘화이트 콤플렉스’(서구 중심주의)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감정을 난도질 당했다며 서글퍼했다. 이번 책 또한 콩쿠르에 목숨 건 한국인 음악가, 과장된 몸짓의 연주자를 하나하나 실명으로 거론하면서 ‘필화(筆禍)’를 예감하게 한다. 이 위악적인 글에 쏟아질 극단적인 비판과 찬사가 벌써 선명하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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