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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추미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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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어렸을 때 추미애의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가 세탁소를 했다. 그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자양분이었다. 1996년 첫 국회의원 선거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구멍가게 둘째딸로 태어난 대처 총리가 영국병을 고쳤듯이 세탁소집 둘째딸이 한국의 썩은 정치를 세탁하겠다."

추미애는 얼마 전 옛날 얘기를 털어놨다. 형편이 어려워 평소 국수를 먹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시댁 친척이 방문하면 따뜻한 쌀밥을 지어내고, 친정 식구들이 찾아오면 국수를 상에 올렸다고 한다. 집안이 더 어려워지니까 친가 쪽 사람들은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외가 친척들은 대접도 변변치 않은데 더 자주 찾아와 위로하고 격려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려울 때 찾아주는 친척이 진짜 친척이고 당이 어려울 때 찾아주는 동지가 진짜 당원이다"고 말을 맺었다.

마흔여섯을 맞은 추미애는 또 다른 가난을 경험하고 있다. 민주당이란 가난이다. 가세가 기운 정도가 아니다. 패가망신이라 해도 할 말 없게 된 게 민주당 집안 꼴이다. 그는 생각할 것이다. 민주당이 어떤 당인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을 두 명이나 배출하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주류세력을 만들어낸 정당 아닌가. 햇볕정책과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서 냉전기류를 거둬내려고 애썼던 정당 아닌가. 수도권 선거구의 반과 호남 전 지역을 석권했던 정치기반 든든한 정당 아니었나. 이제 그 진취적인 정신과 풍요로운 자산은 온데간데 없구나.

추미애는 지금 어려울수록 찾아주는 친정 식구, 진짜 당원으로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사실 민주당을 만들고 그를 정계에 입문시켜 키워준 DJ는 정치적으로 추미애의 친정 아버지다. DJ가 찾아주면 호남 민심도 뒤따라온다고 그는 믿을 것이다. 이틀 전 민주당 선대위 출범식을 분단의 한과 통일 염원을 상징하는 임진각에서 가진 것도 인간적으로 풀이하면 DJ를 향한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DJ는 말이 없다.

추미애는 의지가 굳세고 당차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절대적 가난에 속으로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저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며 홀로서기를 선언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보다 벼랑끝에 더 가까이 있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