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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씨 榮辱의 64년-黃江에서 北岳거쳐 안양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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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룻배를 타고 황강(黃江)을 건너며 꿈꾸었던 소년은 끝내 교도소의 차디찬 감방에 갇히고 말았다.꿈이 지나쳐 과욕(過慾)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집권까지 했지만,역사와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됐다.3일오전 안양교도소에 구속수감된 전 두환(全斗煥.64)씨의 인생은 영욕(榮辱)으로 점철됐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공고.육사를 거쳐 55년 소위로 임관한 뒤 별을 달고 승승장구,쿠데타로 북악(北岳)의 청와대에까지 입성했다.그러나 88년 퇴임후 찬바람만 몰아치는 백담사(百潭寺)에서 유배나 다름없는 769일간이라는 긴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뿐만아니라 89년 12월31일부터 90년 1월1일까지 국회5공청문회 증언대에 서 일부 의원들로부터 『살인마』라는등 욕설도 들어야 했다.그후 연희동에 살며 골프도 치고 호화로운 여행도 했지만 마음고생을 하다 결국 영어(囹圄)의몸이 됐다.
◇합천.대구시절=全씨는 1931년 경남합천군율곡면내천리264황강이 바라다보이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전상우(全相禹.64년 별세).김점문(金點文.76년별세)부부 슬하 6남매중 넷째였다. 全씨는 여덟살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갔다 41년 귀국,대구희도국민학교를 거쳐 47년9월 대구공립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50년6월1일부로 대구공고로 바뀌었다.
그는 대구공고 1학년때 육사에 가기로 마음먹었다.당시 육사는어려운 나라 살림속에서 학비걱정 없이 의식주도 모두 해결할 수있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그는 남달리 축구를 즐기고 좋아했다.1학년때인 50년 6.25가 나자 학도병에 들어가려 했으나나이가 어려 입대하지 못했다.학창시절 신문배달등 어렵게 생활했던 그는 대구공고 2학년 재학때 월반을 해 52년1월 육사에 입학했다.
◇육사시절=육사에 들어간 그는 축구부를 만들어 주장(골키퍼)이 됐다.백넘버 1번을 달고 4학년때인 55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봄철대학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그때부터 全씨는 김복동(金復東).손영길(孫永吉)씨 등과 함께 동기 생들간에 리더십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全씨는 55년9월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했다.당초 육사에 들어온 동기생 228명 가운데 중간탈락자를 빼고 156명과 함께 계급장을 달았다.
◇일선 지휘관 시절=임관과 함께 군문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그가 광주보병학교를 거쳐 처음 배속된 곳은 제21사단.그후 중위로 진급해 사단작전참모부 작전장교와 보병학교 구대장,제25사단72연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대위로 승진해서는 국내 최초의 공수부대인 제1공수특전대에 배치돼 공수교육장교로 근무했다.그가 이규동(李圭東)장군의 딸 이순자(李順子)씨와 결혼한 것은 바로 이때로 58년12월이었다.
59년6월부터 60년12월까지 미국특수전학교에서 심리전교육,미국보병학교에서 유격과정 훈련을 받았다.그는 소령시절인 64년「하나회」를 만들어 정치군인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全씨는 이후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육군참모총장 수석부 관을 지냈다.또 70년11월부터 1년간 제9사단 29연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실전경험을 쌓았다.
이후 「대망의 별」을 단 그는 제1공수특전단장을 거쳐 76년당시 권력의 핵심부 가운데 하나였던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에 임명된다. 약1년반에 걸친 청와대 근무를 마친 全씨는 78년1월제1사단장으로 다시 야전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겼다 79년3월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된다.그가 이후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해사건을 다루는 합동수사본부장으로 권력의 핵심에 다가설 수 있는 위치에 오른 셈이다.
◇보안사령관.합수본부장 시절=79년10월26일 朴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가 쏜 총에 쓰러지자 합수본부장을 겸직한 全씨는 12.12사건과 5.18등으로 권좌를 향한 「진군」을 시작한다. ***軍기반으로 철권통치 全씨는 10.26이후 「하나회」소속 군인들이 장성진급등에서 불리하게 되고 여러 분야에 걸친 자신의 월권행위가 문제되자 일련의 쿠데타 음모를 진행시켜 나간다.정승화(鄭昇和)육군참모총장등을 김재규내란사건 관련혐의로 불법연행하는등 군의 지휘체계를 깨뜨리면서 사실상 제1인자로 부상한다. 全씨는 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나라안이 어수선해지자 80년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시키고 정치인들에게 숙정의 칼날을 들이댄다.김종필(金鍾泌)씨등 부정축재혐의자 체포,김영삼(金泳三)의원의 가택연금등 그가 휘두르는 칼날은 쉴새없이 곡선을 그었다.
그리고 민주화의 역행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최규하(崔圭夏)대통령을 무력화시킨 全씨는 80년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상임위원장으로 취임,입법.행정.사법3권을 거머쥔다.
◇대통령취임.재직=그는 崔대통령의 하야가 있자 80년8월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이른바 「체육관선거」로당선돼 다음달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개헌을 통한 국민투표로 이듬해 3월 임기 7년의 제12대 대통 령으로 취임한다. 취임과 함께 복지국가 건설.정의사회구현등을 내세운 그는 재직중에도 국민들의 끊임없는 저항에 부닥쳤으나 강권으로 이를 억누르며 정권을 가까스로 유지해나갔다.全씨는 단임의 약속을 지킨 최초의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가장 바랐다.
◇퇴임후=全씨는 퇴임후 연희동 자택에 돌아가 전직대통령으로서예우를 받으며 편히 사는듯 했다.그러나 후임자인 노태우(盧泰愚)대통령측의 과거청산으로 88년11월23일 「국민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게 된다.
全씨는 통치자금 139억원등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것을 약속하고 백담사로 향한다.全씨부부는 전기.수도시설 조차 제대로 돼있지 않은 백담사에서 사실상 유배생활을 했으나 정국은 그들을내버려두지 않았다.국회5공청문회가 은둔생활을 하 던 全씨를 증언대에 끌어낸 것이다.
***퇴임후 청문회서 수모 全씨는 이에따라 89년12월 백담사를 떠나 90년 정월초하루까지 국회에서 욕설등 갖은 수모를 당한다. 이후에도 5.18 고소.고발사건,노태우씨 부정축재사건등을 겪으면서 좌불안석하다 결국 95년 12월2일 현정권에 정면도전하는 성명을 낸 뒤 안양교도소에 구속수감되고 말았다.군문에 들어 별을 달고 명예롭게 전역할 수 있었던 그가 정치 군인의 길로 접어들어 비참한 노후를 맞고 있는 것이다.
김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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