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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책’ ⑬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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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걷지 않은 길에 대해 말하는 법

내가 다른 무엇보다 길을 좋아하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길과 관련된 이미지가 있으면 곧장 다운받아 ‘길’이라는 폴더에 넣어두는 건 예사다. 지금 원고를 쓰고 있는 노트북 바탕 화면에도 어김없이 길 이미지가 깔려있다. 호형호제하는 사진작가가 찍은 북아일랜드의 길 사진이다. 바람과 파도가 만나 길을 낸, ‘인간적인 라인’의 검은 해안선이 보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사진이다. 북 아일랜드의 길 사진은 폴더 안에 스무 장도 넘게 있다. ‘길’ 하면 환장하는 나를 위해 그가 선물한 사진들이다. 그는 그런 내 취향을 ‘길 애호증’이라 부른다.
나의 ‘길 애호증’은 선천적이다. 우선 나고 자란 고향이 ‘길’ 하면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곳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청소년기에 내가 기웃거린 골목길은 거짓말 보태 지도를 작성해도 될 수준이었다. 그 시절 난, 낯선 길만 보였다 하면 발정 난 수캐처럼 덤벼들었다. 통학 버스가 있었지만 굳이 산길을 택해 하교했던 것도 그런 ‘유전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그렇지만, 새로운 길에는 늘 새로운 즐거움이 있었다.
길과 관련해 이런 경험도 했었다. 휴가 계획을 짜지 못한 후배들과 무작정 강원도 주문진을 향해 달리던 날이었다. 중간에 들를 곳이 없을까 궁리하던 일행의 시선에 ‘월정사’라는 표지판이 잡혔다. 차의 방향을 틀고 나서 난 줄곧 떠들어댔다. 왜 오대산 월정사가 유명한지, 적멸보궁의 진신사리를 꼭 봐야하는 지, 그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2km에 달하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은 꼭 걸어봐야 하는지에 대해 침을 튀겨 가며 역설했다. 월정사에 대한 내 ‘다식’에 놀랐는지, 초행인 후배들이 질문을 던졌다. “몇 번째 월정사행이세요?” 질문을 듣는 순간 멍해졌다. 대답 역시 흐리멍덩했다. “글쎄, 몇 번째더라?”
마지막에 둘러 본 월정사 대웅전 앞마당은 보강 공사 중이라 어수선했지만 전나무 숲길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양 옆으로 늘어선 길게 뻗은 전나무들이 어제 본 친구처럼 반가웠다. 평일인 탓에 인적은 없었고, 숲길은 그만큼 더 고즈넉했다. 강화 전등사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양산 통도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와 닿는 흙의 감촉이 더없이 부드러웠다.
후배들은 그런 내 행동을 자기 집 안방과 마루를 넘나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행위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또 질문 하나를 던졌다. “지금처럼, 오실 때마다 맨발로 걸으세요?” 질문을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전나무 숲에서 뿜어져 나온 피톤치드 때문에 머리가 맑아진 탓인지 이번엔 명료한 답을 던질 수 있었다. “아니, 처음인데.” 후배들도 놀랐지만 대답을 안겨준 나 역시 놀랐다. “처음이라고?”라는 반문을 나부터 먼저 삼키고 있었다.
맞다. 명성 높은 월정사는 나 역시 초행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대산 전나무 숲길과 적멸보궁 진신사리 따위의 정보를 다녀온 것처럼 기억하고 있었을까?
내력은 이랬다. 처음 프리랜스 라이터를 시작했을 때 내게 주어진 일은 대부분 국내 여행지와 관련된 정보를 취급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물놀이하기 좋은 10곳, 캠핑 장소로 적합한 10곳, 물 맑고 인심 좋은 휴가지 10선 등으로 소개되는 기사들이었다. 이 일을 5년 넘게 하면서 생긴 직업병이 있었으니 바로 ‘기시감’이었다.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전국의 유적지, 관광지를 꽤 찾아다녔지만 그래도 못 챙긴 곳이 부지기수였다. 흥미로운 건 다녀온 곳이 초행길일 지라도 언젠가 한두 번 왔던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였다. 특히 길에 대해선 더 그랬다. 사진으로만 보면 엇비슷한 길이어도 그 길을 직접 걷다보면 느껴지는 뉘앙스는 각양각색이다. 그 날의 날씨가 수천 만 가지 조합 중 하나이면, 거기에 따른 길의 디테일 역시 수백 만 가지이기 때문이다.
후배들과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 들어섰을 때의 날씨는 사진에서 챙겼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사진 속 월정사 숲길은 전나무 사이로 스며든 햇볕이 숲길을 부드럽게 휘감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전나무 숲길은 바람의 스케일이s 컸고, 구 대관령 길을 덮친 지독한 안개와 짝을 맞춘 는개가 길 위를 적시고 있었다. 몸은 차가웠지만 발바닥의 감촉이 부드러웠던 건 는개에 알맞게 젖은 흙 때문이었다.
얼마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후배가 진행한 기사를 읽던 도중이었다. 스페인 그라나다의 작은 산동네 알바이신을 다룬 기사였다.

‘그라나다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이곳에 집을 짓고 길을 만들었다. 그 골목길에서 그라나다에 대한 온갖 스토리들이 흘러나왔고, 이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새로운 스토리를 이어가는 중이다. (중략) 어떤 길에는 로마인의 흔적이 엿보이고, 또 어떤 돌담에는 아랍인의 손때가 묻어있다. 보어인들이 끌로 파내고 장식한 문양도 알바이신에는 공존한다. 우기인 봄의 알바이신은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공기가 공존하며 독특한 기후를 만든다. 이곳의 봄이야말로 가을의 정서를 품고, 늦겨울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골목길은 촉촉이 젖은 여인들의 머릿결처럼 윤기가 흐르고, 차가운 기운을 녹이기 위해 서로를 끌어당긴다. 오히려 뜨거운 햇볕에 아득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여름의 알바이신이 더 고독하다. 골목길 사이사이로 기타 선율이 흐르고 가끔 사람들의 웃음소리만 공명을 일으킨다. 그 나른함에 취해 골목들도 춤사위를 하듯 흐물흐물해진다. 그게 바로 알바이신이라는 이미지에 중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사진작가 정세영의 글 중에서.

가보지도 않은 알바이신을 다녀온 것처럼 느낀 건 ‘우기인 봄의 알바이신’ 운운하는 대목부터였다. 갑자기 머릿속으로 봄의 알바이신에 대한 이미지 하나가 명료하게 떠올랐다. ‘천개의 표정’이라면 그야말로 알바이신의 다양한 골목길들을 두고 하는 말일 거라는 생각도 뒤따랐다. 후배에게 곧장 감흥을 전한 건 당연했다.
“알바이신, 좋지? 그 골목골목의 운치란!”
지난 10년간의 내 알리바이를 꿰고 있는 후배의 취조가 이어졌다. “
알바이신 다녀왔다는 얘긴 없었잖아?”
“어? 그래, 맞다. 알바이신은 늘 생각만 있을 뿐, 다녀오진 않았지.”
사실 그때 후배에게 맥없이 진술하긴 했지만, 난 지금도 알바이신에 다녀왔는지 다녀오지 않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이 초행이었지만,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다녀온 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그런 생각의 배후엔 ‘길 애호증’이라 불리는 내 이미지 중독이 자리하고 있다. 길과 관련된 인상적인 이미지를 보고 그 길이 어디에 있는 길인지 확인하거나, 좀더 발전하면 그 길의 내력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거나, 거기서 좀더 발전하면 그 길에 가보는 것. 그게 내 ‘길 애호증’의 다양한 증상이다. 정작 중요한 건, 내가 그 다양한 증상 모두를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행을 초행이 아닌 것처럼 거짓 브리핑하는 것이라면 문제겠지만, 내겐 그런 위선적 제스처에 대한 의도는 없다. 단지 길을 좋아하기 때문에 벌일 수 있는 다양한 퍼포먼스일 뿐이다.
얼마 전 프랑스의 문학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을 읽다가 흥미를 느낀 건 그 때문이었다. 목차의 앞머리를 장식한 건 이런 타이틀이었다. ‘비독서의 방식들’.
저자가 언급한 네 가지 방식은 이랬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경우’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
책을 읽어나가면서 난 수시로 ‘책’이라는 부분에 ‘길’을 대입해서 읽어봤다. ‘길을 전혀 걷지 않는 경우’ ‘길을 대충 훑어 걷는 경우’ ‘다른 사람들이 하는 길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저자가 ‘책을 읽었다’는 말이 얼마나 다양한 수준과 표정을 만들어내는지 사람들에게 묻고 있다면, 난 ‘길을 걸었다’는 말이 얼마나 다양한 수준과 표정을 만들어내는지 내게 묻고 싶었다. 그리고 ‘제대로 읽었다’의 의미처럼 ‘제대로 걸었다’는 의미까지 알고 싶었다.
물론 ‘책’이라는 단어를 ‘길’이라는 단어로 바꾼 뒤 똑같은 결론을 얻기란 난망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언급하는 결론은 울림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내 식으로 다시 말하면 ‘중요한 것은 이런 저런 길을 걸었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걷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어렴풋이 알겠다. 제대로 걷기 위해선 ‘길 애호증’ 따위는 휴지통 속으로 삭제해버리고, 길 위에 맨발로 서는 거라는 걸. 그래야 그 망할 놈의 기시감 따위도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거라는 걸.

글_ 문미루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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