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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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사부인(査夫人)이에요.』 대문밖까지 배웅하고 온 서여사가 말했다. 사부인.우변호사의 장모인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린 50대 초반쯤의 그녀 모습에 돌아간 어머니를 보는 듯했다.
『딸 가진 어머니는 죄인같애요.이리 눈치보고 저리 신경쓰고….』 사부인이 가져온 선물 꾸러미를 방 한쪽 구석으로 치우며 서여사는 웃었다.
『딸이 있다 해도 나는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어요.그래서 아예 삼신 할머니가 딸을 점지하지 않았는지….하지만 아리영씨 같은 예쁜 딸이 있었으면 큰 의지가 될 텐데 하는 생각이 요즘에야 드네요.아버님께선 안녕하시죠?』 서여사는 여전히 서글서글했다.일찍이 남편과 사별하여 유복자 데리고 재혼했다 이혼한 여인같지 않은 「메리 위도」다.
『우변호사님의 장모님이신가봐요.아주 반듯하신 분같아요.』 아리영의 말에 서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애는 서울에 와도 집에서 지내지 않아요.줄곧 호텔살이지요.내가 신경쓸까봐 그러는 거지만 본인은 호텔이 더 편하다고 우기니 도리 없네요.내일 모레 떠나는데 다만 하루라도 처갓집에서지내라고 사부인이 데려가셨다는 거예요.』 오늘 아침 체크아웃했다는 것은 그 때문이었는가.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우변호사 아내에겐 엄청난 「빽」이 있어 보였다.어머니라는 배경.그것은 시집간 딸에겐 더할 나위 없는 산성(山城) 같은 존재다.비상시의 피난처요,평상시의 후광이다.
고대부터 우리 조상은 산꼭대기의 능선(稜線)을 따라 거대한 산성을 쌓았다.돌무더기를 쌓아 올려 굽이굽이 이어 묏부리의 넓은 공간과 물줄기까지 확보했다.이것을 외국 학자들은 「조선식 산성」이라 부른다.독특한 우리 양식이다.백제말로 「기」,신라말로는 「자시」라 했다.이 말이 그대로 일본에 건너가 성을 가리키는 일본말 「기(き)」와 「사시(さし)」가 되었다.현대 일본어로도 성은 「기」다.그러나 「사시」는 지명이나 사람 이름 등에만 남아 있다.도쿄(東京) 근교의 소도시 무사시노(武藏野)의「사시」가 바로 그 중의 하나다.「곳간」을 뜻하는 한자 「장(藏)」으로 「성」을 가리키는 옛말 「사시」를 나타내고 있는 데엔 이유가 있다.고대의 산성은 갖은 무기와 식량의 커다란 창고이기도 했던 까닭이다.
서여사가 일러준 말풀이다.
어머니란 딸에게 있어 영원한 곳간이기도 한 것을….
아리영에겐 산성이 없다.상실감이 어깨를 눌러 나른하게 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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