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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아버지가 차를 몰아 데려다주었다.서울가는다음 차편은 30분 후에 떠난다.
『커피 한잔 할까?』 표를 끊은 다음 아버지는 자판기에서 뜨거운 커피를 빼왔다.여름철인데도 뜨거운 것이 좋았다.더위가 무색하리만큼 구내 냉방이 잘돼 있는 탓인지, 아니면 마냥 춥고 불안한 마음 탓인지….
『아버지.』 새삼스러운듯 부르는 아리영을 아버지는 종이컵을 입에 대다 말고 지켜봤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만 사랑하셨겠지요?』 느닷없는 질문이었으나 아버지는 별로 의외로워하지 않았다.
『글쎄.』 그 대답이 오히려 의외로웠다.
『아버지말고 딴사람을 사랑하셨을 수도 있다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 아버지는 말꼬리를 흐렸다.
정길례여사와의 일이 겸연쩍어 어머니 얘기는 되도록 피하려는 것인가. 『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딸보다 아버지가 더 소중하셨어요.어머니처럼 남편을 골똘히 사랑한 아내도 드물 거예요.』 아리영은 기쓰고 어머니를 대변하고 있었다.왜 그런지 자기도 알 수없었다.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아버지는 아리영의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여자에겐 행복해져야 할 의무가 있다.그걸 잊지말아라.』 서울에 닿도록 그 말이 귀에 남아 맴돌았다.아버지는 아리영의 혼돈과 방황을 눈치채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도착 즉시 S호텔로 가서 벨 데스크에 그가 맡겼다는 비행기표를 찾았다.아리영 이름이 워드 프로세서로 찍힌 호텔 전용의 그 봉투는 단단히 봉해져 있었으나 비행기표만 달랑 들어있을뿐 편지나 메모 한장 없었고 우변호사의 이름도 없 었다.
철저히 조심스런 전달법이다.그러나 어쩐지 서운했다.방 호수나알아보려고 프런트 데스크에 문의했더니 바로 오늘 아침에 체크아웃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리가….
미심쩍었지만 도리 없었다.
서여사 출판사를 찾아갔다.외할아버지 책 핑계를 대고 서울에 왔으니 어떻든 서여사는 만나야 했다.그녀를 만나면 우변호사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기대도 가졌다.
서여사 방엔 선객(先客)이 있었다.
은조사 치마저고리를 나붓이 입은 여인이었다.
대청마루에 선채 머뭇거리는데 여인이 방안에서 나왔다.
『바쁘실 텐데 저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하얀 버선이 눈부셨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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