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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국량을 키워 나가는 비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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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을 잘 먹어야 국량이 커진단다." 어머님이 손자들에게 가끔 하는 말씀이다. 매사에 따지기를 좋아하는 내가 이 순간을 놓칠 리 없다. "어머니, 그건 먹는 국의 양이 아니라 인간의 그릇인 국량(局量)을 말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여유있게 받아넘기시는 어머니. "그게 그거 아니니?"

*** 인간의 그릇에 담긴 내용물

인간의 그릇. 격변 또는 혼돈의 세월이라고 할 만한 요즘엔 눈에 띄는 인간이면, 불현듯 그의 그릇을 가늠해보는 어쭙잖은 버릇이 생겼다(물론 나 자신에 대해서도 가끔 그런 생각에 빠져든다). 그릇의 크기와 종류, 현재 그릇에 담긴 내용물의 적절함까지. 간장 종지 같은 그릇에 넘치도록 눌러 담다가 '펑 터진 배'처럼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달항아리 같은 그릇임에도 허랑하게 비어 있어 '찌그러진 풍선'처럼 된 사람도 있다. 옛 선비들이 백자 그릇을 곁에 두고 완상하던 까닭을 알 것도 같다. 연못 또는 그릇에 물이 담긴 형상의 수택절(水澤節) 괘가 선비의 절도와 예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 까닭도 짐작이 간다. 절도 있는 생활을 해야 하지만, 절도가 도를 지나쳐서도 안 된다. "절도 있는 생활을 하도록 하면 발전하는 것은 굳센 것과 부드러운 것이 나뉘어 굳센 게 중심을 얻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시대인 어제보다 적어도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는 개명한 시대임이 분명한 21세기의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간장 종지보다 달항아리가 우월하다는 식의 위계론을 들먹이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잔칫날 정작 귀한 것은 간장 종지 같은 야무진 그릇들이며, 장기에서 국면이 좁혀지고 접전이 뜨거워진 최후의 순간에 왕(王)의 무능함에 대비되는 졸(卒)의 요긴함이 허를 찌르고 들어오기도 하잖는가.

하지만 간장 종지든 달항아리든 저마다의 국량을 키울 수 있는 비방은 없을까. 나는 그것이 자신의 그릇됨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그릇됨(器)을 아는 것은 결국 자신의 그릇됨(wrong)을 아는 것과 통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마음 속에서 사(私)와 공(公)이 대화를 나누는 정신적인 메커니즘을 마련하는 것이다.

묵자는 "창장(長江)이나 황허(黃河)는 작은 시냇물이 자기에게 가득 차도록 흘러드는 것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커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당시의 그는 훌륭한 군주의 덕목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인간이 자신의 그릇을 키우는 방법으로 받아들여도 손색이 없다. 대하의 공공성에서 벗어나지 않되, 작은 시냇물의 사사로움을 따뜻하게 품는 것. 거꾸로 작은 시냇물의 사사로움을 품어 들이되, 마침내 대하의 공공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어찌 사사로움과 공공성이 함께할 수 있느냐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호통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는 나름의 공공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잘라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막다른 골목에서는 단연코 사사로움을 택할 것이라고. 묵자의 말은 이어진다. "그러므로 창장이나 황허의 물은 한 근원에서 나온 물이 아니며, 수천 냥의 갖옷은 한 마리 여우의 흰 털가죽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은 환하기만 하지 않으며, 큰 물은 맑기만 하지 않으며, 큰 불은 밝게 타기만 하지 않으며, (…) 좁은 골짜기의 물은 마르기 쉽고, 낮은 흐름은 바닥나기 쉬우며, 돌이 많은 땅엔 식물이 자라지 않으며 (…)." 운운.

*** 마음속 私와 公 대화 나눠야

그릇을 넓히고, 국량을 키워간다는 것. 그렇다면 아이들만 자라는 것은 아니다. 어른 역시 이승을 하직하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야 한다. 다시 어머니의 말씀이 귓가를 맴돈다. "국을 잘 먹어야 국량이 커진단다." 그러고 보니 나를 비롯한 많은 이가 국량 키우기를 핑계 삼아, 그야말로 국물이나 들이켜는 식으로 욕심의 뱃고래만 키우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마디를 돌려드린다. "어머니, 그게 그거는 아닌 것 같은데요?"

강영희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