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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중간평가 각서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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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한 지 2개월 만인 1988년 4월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은 299석 중 125석밖에 얻지 못했다. 반면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 등이 포진한 야 3당은 164석으로 절반을 넘었다. 여소야대였다. 그해 말 5공 비리 청문회로 시작해 정부·여당은 야권이 장악한 국회에 속절없이 끌려 다녔다. 특히 대선 공약인 중간평가 실시 여부를 놓고 정국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89년 3월 21일 신라호텔에서 만난 김윤환 민정당 총무와 김원기 평민당 총무 간의 비밀각서는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당시 제2 야당인 통일민주당은 평민당이 제1 야당으로서 정치를 주도하는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중간평가를 하라는 압박을 계속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평민당은 국민투표로 치러지는 중간평가가 자칫 정부·여당에 면죄부를 줄 수도 있음을 우려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 결과 김-김 두 총무는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 대신 5공 청산과 광주 문제를 성의 있게 처리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각서가 만들어지기까지 최대 걸림돌은 광주 문제 해결 방안의 하나인 정호용 의원을 어떻게 처리할지였다. 5공 핵심 인물로 당시 여권 내 실력자인 정 의원은 김윤환 총무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김 전 의장의 회고담.

“나라를 위해 친구인 정호용을 포기하라고 했더니 ‘허주(김윤환 총무)’가 ‘그를 배신할 수 없다’며 눈물까지 흘렸다. ‘정호용 문제가 해결 안 되면 광주 문제가 해결 안 되고 그렇게 되면 파국으로 간다. 대통령을 살리는 방법을 택하라’고 설득해 각서를 만들게 됐다.”

각서가 만들어진 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등 5공 청산 움직임이 급물살을 탔다. 민정당은 ‘지자제(지방자치제) 실시’ ‘5공 핵심 인사 공직 사퇴’ 등 각서에 담긴 조치들을 잇따라 발표했다. 다만 정 의원은 “의원직을 사퇴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그러던 중 그해 6월 평민당 서경원 의원의 밀입북 사건이 발생한다. 정부·여당은 이를 호재 삼아 대대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했고 각서에서 합의된 사항들도 이행이 미뤄지게 됐다.

김 전 의장은 “공안정국으로 야당인 우리가 고생할 때 여권 내부의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각서를 공개하고 싶은 유혹도 많이 받았다. 그랬다면 정국 흐름이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허주와의 신의 때문에 참았다”고 말했다.  

박승희·김경진 기자

각서 전문

우리는 현 시점이 자칫하면 6.29선언과 4.26 총선에 의하여 이루어진,민주주의에의 귀중한 국민적 재산이 파탄에 직면할 위기에 있다고 보며 국가 운명이 파국 일로에 치달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같이 한다.아울러 우리는 이제 우리 국민의 역량이 평화적이고 합헌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고 본다. 이 때를 당하여 국가운명에 대해서 제1차적 책임 있는 우리 양당은 두려운 책임감과 확고한 신념 아래 오늘의 난국을 다음과 같이 처리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이 각서를 작성하는 바이다.

1989.3.21

양당은 이른 바 5공 핵심인사의 공직사퇴와 전최 전직대통령의 국회 증언 등 5공청산과 민주화 추진문제를 지난 3월10일에 있은 노태우김대중 회담의 합의정신에 입각하여 이를 조속한 시일내 실시한다.

이상의 조치가 처리 또는 실현이 합의되었을 때는 광주 및 5공비리특위는 과감히 특위의 조치보고서를 작성하고 이의 국회 제출과 더불어 위증자에 대한 고발조치를 한 후 상기 양 특위의 임무를 종결하고 5공천산문제는 완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양당은 긴박한 국가적 난문제의 해결과 지자제 연내 실시 등 우리 정국이 당면한 중대과업에 대처하기 위하여 깊이 숙고한 끝에 현 시점은 중간평가를 실시할 시기가 아니라는데 합의한다.

1989.3.21

민주정의당을 대표하여 김윤환
평화민주당을 대표하며 김원기

5공청산·광주민주화운동문제의 처리

특별법을 제정하여 광주시민의 명예회복과 유가족 보상자 기타 필요한 사람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한다.
정호용씨는 공직에서 물어나고 이희성씨는 공개 사과문 발표.
정호용 소준열 이희성씨 등에 대한 위증고발은 국회 광주특위에 처리하도록 한다.
상무대 부지 전부를 광주시에 무상 인도하고 정부는 여기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관 건립,공원 조성 등 필요한 사항이 실현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광주문제가 마무리 짓는 시점에서 정부와 전두환씨는 국민 앞에 사과 유감의 뜻을 밝힌다.

5공비리문제의 처리

이원조씨의 공직 사퇴
기타 5공비리 특위에 고발된 자의 처리

80년 언론통폐합 및 해직관계자 처리

허문도,이상재 씨 중 1인에 대한 사법 처리

전직대통령 증언문제 처리

특위는 광주민주화 문제와 5공비리에 대해서 사전에 문서로써 질문서를 작성하여 최전 양씨에게 발송한다.
전직대통령이 지정된 날짜에 국회의 비공개회의(1회 한)에 나와서 증언하도록 노력한다.
증언 중 미진한 사항이 있으면 총무단회의의 합의에 의하여 각당 1인씩 보충질문을 실시하되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존중한다.

민주화문제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악법의 개폐문제는 여야 각당이 성의를 다하여 이행한다
여야는 5월까지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이를 실천에 옮긴다

지자제 실시

서울특별시,직할시 각 도의 의회의원선거는 89년말까지 실시한다.
전항 지역의 자치단체장의 선거는 90년말까지 실시토록 하고 여야간 협상을 벌인다.
89년 중이라도 합의된 시도에 대해서는 자치단체장의 선거를 시범적으로 실시한다
기초 자치단체의 의회와 장의 선거는 91년말까지 실시하되 여야 협상에 따라 앞당길 수 있다.

공무원 노조

공무원의 노조 결성을 하도록 하기위하여 여야간에 구체적 협의를 진행한다.
공무원 노조 결성의 단계적 허용 실시에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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