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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중풍] “벽만 보고 살다 가서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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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스톡홀롬시 노인시설 솔베르야에서 중증 치매환자 아르네가 운동치료사 제니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배급표를 보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치매의 진행을 늦추는 효과가 있다.

“기억의 끈을 이어가는 추억 살리기”

# 지난달 19일 스웨덴 스톡홀름 외곽 중풍치매노인 시설인 솔베르야. 중증 치매 환자인 아르네(85) 할아버지는 이날도 옛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 배급표를 들고 우유를 사러 갔어. 어머니가 한 장씩 잘라주면 버터도 사고 고기도 사곤 했지….” 할아버지의 손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식료품 배급표가 들려 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그저 나이 드신 분의 회상이 아니다. 기억의 끈을 이어가는 치매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배급표도 운동치료사 제니(27)가 준비한 상자에서 꺼낸 것이다. 그 상자에는 1940년대의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니는 물건을 하나둘씩 꺼내며 할아버지를 시간 여행으로 이어 가고 있었다.

이번엔 옆에서 묵묵히 할아버지를 지켜보던 다르마(90) 할머니가 나섰다. 할머니 역시 중증 치매 환자다. 할머니는 상자 속의 구두와 잡지를 들추며 거들기 시작했다.

제니는 털모자를 집으며 “어건 어때요. 이 털모자 기억나세요. 아가씨들은 이런 드레스를 입었다면서요”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기억을 유도하는 제니의 표정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르네 할아버지와 다르마 할머니는 2년 전 이곳에 올 때 이미 가족을 알아보지 못했다. 최근에는 상태가 나빠져 말하는 것은 물론 먹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들도 옛일을 상기시키면 기억과 감정이 살아난다.

3층 건물인 솔베르야의 복도와 거실 곳곳에는 인형·담뱃갑과 같은 추억의 물건이 놓여 있다. 응접실의 가구도 옛날식이다. 지하의 40여㎡ 공간은 1940~50년대의 놀이공원을 재현했다. 치매 노인에게 가장 평안하게 느껴지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매일 오전에는 요리·음악감상·무도회 같이 노인들이 추억을 되살릴 만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과자를 만들면서 예전의 입맛을 회상하고 지나간 유행가를 들으며 잠자는 청각을 일깨우는 식이다.

오감을 자극하면서 과거 기억을 일깨우는 치료법은 2001년 이곳에서 처음 시작됐다. 오감 치료는 이 시설의 책임자인 아케 크로난데의 아이디어다. 그는 이유없이 불안해하고 난동을 부리던 치매노인도 과거 속에서 안정을 찾는다는 점을 주목했다.

크로난데는 “기억을 잃었다고 벽만 보고 남은 인생을 보내게 해서는 안 된다”며 “치료할 수는 없어도 치매노인을 소중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질 높은 삶을 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혼자 살아가기 연습”

#지난달 22일 스웨덴 우메오 대학병원의 노인전문병동. 다니엘(85) 할아버지는 물 끓이는 법, 가스 사용법을 배우고 있었다. ‘혼자 살아가기’ 연습이었다. 지난 3월 할아버지는 갑자기 머리와 다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20년 전 부인을 먼저 보낸 뒤 쭉 혼자 살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면 구급차가 출동하는 손목시계 형태의 경보기를 이용했다. 할아버지는 우메오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필요한 처치를 받고 노인전문병동에 입원했다. 바이러스성 감염에 중풍 초기라는 진단이었다.

수술을 받은 뒤부터는 연일 재활훈련이 반복됐다. 의사와 간호사뿐 아니라 물리치료사·사회복지사·심리치료사·영양사가 한 팀이 돼 치료를 맡았다. 목표는 ‘집으로 돌아가 혼자 힘으로 생활하는 것’이었다. 치료실은 할아버지의 집과 똑같은 환경으로 꾸몄다.

물리치료사는 먹고, 걷고, 화장실에 가는 기본 활동을 훈련하는 일을 맡았다. 할아버지의 키와 팔길이에 딱 맞는 보조 도구도 주문했다. 직접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식사 후 반드시 커피를 마시는 할아버지를 위해 안전한 가스 사용법과 물 끓이는 법도 훈련에 포함시켰다.

심리 치료사는 할아버지가 몸의 병으로 마음마저 병들지 않도록 격려하는 일을 한다. 일주일에 두 번 할아버지와 만나 즐거운 생각을 유도하고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영양사는 심장과 폐기능이 떨어진 할아버지를 위한 식단을 짠다. 간단한 조리법도 가르친다. 사회복지사는 할아버지의 집 근처 복지센터와 의논해 퇴원하면 재가복지사가 일주일에 두 번 집으로 가 장을 봐주고 목욕과 청소를 도와주도록 했다.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할아버지가 인터넷으로 의료진과 대화하는 방법도 가르쳤다.

한 달 후 치료가 마무리되면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퇴원할 때는 치료팀이 한자리에 모여 할아버지의 퇴원 후 생활을 위한 회의를 연다. 필요한 기록을 지역의 주치의와 복지센터에 전달한다.

우메오 대학병원 노인질환센터의 요스타 부흐트 박사는 “노령화가 일찍 진행된 스웨덴은 노인을 돌보는 데 있어 가족보다 사회의 책임을 늘리고 가능한 한 혼자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며 “퇴원 후 건강까지 책임지는 맞춤 케어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추가 질병과 부상을 예방하므로 결국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김창규·김은하·백일현·김진경·김민상·이진주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편집=안충기·이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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