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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칼럼>관철동시대 61.사제 도전 27번기 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욱일승천의 이창호가 2차 대공세를 시작한 93년 가을 관철동한국기원은 한파가 두려운듯 몸을 움츠렸다.몇명의 기사가 낙엽처럼 소리 없이 바둑계를 떠났으나 아무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는사람은 없었다.
9월에 마산의 무명기사 김판율(金判律)2단이 47세로 은퇴했다.그는 유명한 씨름 장사 김성률씨의 형이다.대회가 시작되면 경비를 아끼려 야간 열차로 올라와 젖먹던 힘을 다했으나 거의 매번 첫판에 탈락하곤 했다.동생을 자랑하다가도 자 기가 동생 이름에 먹칠을 한다며 쓸쓸해하곤 했다.
『대국료가 여비밖에 안돼요 하던 金2단은 보기 드문 순박한 사람이었으나 약육강식의 승부 세계엔 적합하지 않았다.
10월엔 인천의 노기사 이일선(李一善)4단이 은퇴했다.여든 노구의 李2단이 손자뻘의 소년들과 1차 예선에서 대국하는 모습은 바둑계만이 지닌 특유의 여유였으나 이제는 더이상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12월엔 여류 윤희율(尹希律)초단이 은퇴했다.여고졸업후 바둑 특기생을 우대하는 일본 쇼와(昭和)약대에 다니며 많은 화제를 뿌렸던 尹초단도 이때는 어느덧 45세의 중년이었다. 바둑판 361로에 새겨보는 프로들의 꿈은 다양하다.어떤 이는 단 한판 이기기를 소원하고, 어떤 이는 본선을 꿈꾸며, 어떤 이는 천하 제패를 원한다.
그러나 재질은 하늘이 내리고 그게 꽃피려면 시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옛사람이 말하기를 조숙(早熟)은 만성(晩成)만 못하다』하였으나 오늘날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말을 배우자마자 바둑돌을 잡고, 유치원때 묘수풀이를 풀고, 국민학생 때는 프로에게 배운 소년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관철동에 밀려들고 있었다.소년기사들은 나날이 강해지고 젊은 기사들은 나날이 표한해져가는데 이 기계화 사단의 선봉에 이창호가 있었다.이제는 빙긋 미소마저 짓기 시작한 신비로운 이창호.
고광락(高光洛)선생이란 노기사가 있다.생년은 1916년.45세에 프로가 되었고 74세에 겨우 2단으로 등단한 분이다.
그는 어쩌다 여류기사라도 만나 한판 이기면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이여』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곤 했다.어린 비둘기가 아직 재를 넘지 못한다는 이 말은 나이 든 선배들에겐 자못 기분좋은 뉘앙스를 담고 있었기에 한때 대유행했다.
큰 승부가 시작되면 高선생은 또 말하곤 했다.『지장(智將)이불여복장(不如福將)이여.』 지혜로운 장수가 덕있는 장수만 못하고 덕있는 장수는 복있는 장수만 못하다는 옛말을 줄인 것이었다. 어느날 고광락선생에게 물었다.『이창호는 계속 이기니 복장인가요.』 高선생은 할말을 못찾아 허허 웃기만 하더니 아주 엉뚱한(?) 답변을 했다.『창호는 실력이 세지.실력이 세.』 무적의 선봉 이창호,그 뒤를 따르는 윤성현.최명훈등 무공이 절륜한신4인방.또 그 뒤의 긴긴 소년강자들의 행렬.이 기계화사단의 내습으로 바둑계 판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이창호에겐 이들과 공을 나눠가질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나 그들은 함께 연구했고외관상 힘을 합친 새로운 물결로 보였다.
93년 하반기.이창호는 국수위 탈환을 신호로 2차 대공세를 개시했다.세계대회 우승후 갑작스레 기세가 꺾인 서봉수가 첫 제물이 되었다.서봉수9단은 국기(國棋)타이틀 단 한개를 보유하고있었는데 10월에 이창호가 달려와 3-1로 손쉽 게 탈취해 가버렸다.20세에 신화를 만들며 정상에 올랐던 서봉수의 마지막 국내 타이틀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천하통일을 노리며 전진해오는 이창호 앞을 스승 조훈현은 결사적으로 가로막고 나섰다.
이 겨울에 적어도 5개기전에서 두사람 이 맞붙을 전망이었다.혈전은 불가피했다.
스승과 제자의 기구한 인연이었지만 그 인연은 계속 될 수밖에없었다.젊은 제자는 천하통일의 야망을 지녔기에 세대교체라는 물갈이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고 구시대의 대표 조훈현은 그걸 막을수밖에 없었다.바둑사에 기록될 「사제도전27번 기」는 11월 배달왕전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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