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강위석칼럼>"貴"를 파괴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1737년에 태어났다.그는 오늘날 표준에서 보아도 가장 열렬했던 세계화주의(世界化主義) 지성인이다.내가 『열하일기』(熱河日記.尹在瑛 번역)를 처음 읽은것은 이 책이 쓰여진지 200년쯤 뒤였을 것이다 (영국 사람 애덤 스미스가 쓴 『國富論』은 1776년 세상에 나왔다).박지원은 당시 중국의 넓은 도로를 보고 우리나라가 가난한 까닭은 길이 너무 좁아 마차가 다닐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마디로 단언했다.베이징(北京)의 천주교 성당에서 서양화에 경탄했고, 오르간 음악의 황홀을 들었다.
『열하일기』에서 생각나는 곳을 찾아 읽곤 하는 것은 내겐 짭짤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참말이지 사람은 밥만 먹고는 살 수없다.이 말은 어떤 경우에 쓰이든지 대체로 밥만큼이나 절실하다.내가 『열하일기』를 읽어서 반주(飯酒)처럼 마 시는 것은 우리의 열린 인텔렉추얼 연암선생이 주는 오히려 가장 참다운 조선식 허무주의의 큼직한 향기다.
호질(虎叱)에 나오는 북곽(北郭)선생은 벼슬마저 마다하는 고상한 선비다.손수 교서(校書)한 책이 1만여권,구경(九經)의 뜻을 해석하여 저술한 책이 1만5,000권.그는 어느날 밤 마을의 이름난 정절과부 동리자(東里子)의 집을 찾아 가 한 방에서 수작하다가 그 과부의 다섯 아들에게 문구멍을 통해 들키고 만다.이 다섯 아들은 어쩐 일인지 제각기 각성받이다.모두 북곽선생한테 글을 배우는 제자들이다.이들은 지금 자기 어머니와 성적(性的)놀이를 벌이고 있는 놈이 자기 네 도덕 높은 글선생일리는 없고 천년 묵은 여우가 둔갑한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는 다음과 같이 의논한다.
『들으니 여우의 관(冠)을 얻으면 큰 부자가 되고,신을 얻으면 대낮에도 형체를 감출 수 있고,꼬리를 얻으면 아양을 잘 떨어 남을 즐겁게 할 수 있다고 하니 우리 저 놈을 죽여 서로 나누어 갖자.』 북곽선생이 소스라쳐 놀라 허둥지둥 달아나다가 그만 들 가운데 파놓은 똥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마침 이때 선비 고기가 특히 맛있다는 말을 듣고 호랑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북곽선생은 그렇고 그런 대통령들,동리자는 그런 대기업들,다섯 아들은 그런 국민,호랑이는 그런 검찰이라고배역을 꼭 짜맞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단지 이와 엇비슷한 게임이 나라 안에서 오랫동안 장기 흥행되고 있음만은 사실이다).호랑이가 꾸짖는다.
『선비란 참으로 구린 것이군.제것 아닌 것을 몰래 취하는 것을 도(盜)라 하고,사람을 해치고 재물을 빼앗는 것을 적(賊)이라고 하거니와,너희들 사람이란 짐승은 심지어 돈을 형님이라고까지 부른다.』 『측자비급』(測字秘급)이라는 책에는 盜나 賊보다 한 수 더 나아간 것을 귀(貴)라고 한다고 씌어 있다.貴는지위요 권력이다.盜는 훔치고 賊은 빼앗는 수고를 하지만 貴는 바치러 온 재물(貝)을 가만히 앉아서 받을 뿐이다.이렇게 해서모은 재물을 넓직한 방석 밑에 깔고 앉아 있는 것이 「貴」라는글자의 자태다.이 호랑이는 저도 기껏 한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는 주제에 냄새가 몹시 구리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음식(북곽선생)에는 입도 대지 않고 투정(虎叱)만 늘어놓다가 슬그머니 가 버린다.
연세대를 설립한 선교사 집안의 자손인 홀리스 언더우드는 일제(日帝)가 한국에 해 준 것으로 잘한 것이 있다면 철도를 부설한 것이나 신식학교를 세운 것이 아니라 조선조의 양반제도를 파괴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에 틀린 절반이 있다면 그것은 조선 내부의 양반이라는 「귀」를 파괴한 대신 식민 일본인이라는 「귀」를 창립했다는 사실이다. 해방된 다음 50년동안 공산주의,경제적 빈곤과 불평등,문화적 저개발 이 세가지 적과 싸우는 동안 이 싸움을 지도한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조선조시대의 「귀」를 슬슬 차지하게 되었다.문무 양반(兩班)대신에 군벌,재벌,학.관(學.官)벌, 노(勞)벌,이 「사벌(四閥)」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미 자리를 잡았거나 착실히 잡아가고 있다.이들은 때로 원수처럼 다투지만 실은한방 안에서 원탁 주위에 삥 둘러앉아 결탁된 게임에 열중한다.
귀의 다른 이름은 부패다.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문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자.북곽선생들이든지,천년 묵은 여우들이든지 부패란 그들의 관.신.꼬리다.창의력과 부지런함과 절약이라는 방망이를 휘둘러 부패를 파괴하자.「귀」를 파 괴하자.
(논설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