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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칼럼>관철동시대 60.러시아에서 열린 국수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93년5월 마지막 노국수 신호열선생이 타계했다.80세.
선생은 한학의 대가로 서울대등에서 강의하며 많은 후학을 길렀다.젊은 시절 조선 최고수였던 노사초국수에게 바둑을 사사하여 함께 풍류를 즐기더니 45년 조남철씨가 한성기원을 설립했을 때프로2단에 추천됐다.선생이 타계하면서 조선조부터 이어온 「선비바둑」또는 「풍류로서의 바둑」은 사실상 맥이 끊어졌다.그로부터석달후 한국바둑은 도쿄에서 유창혁6단이 후지쓰배를 획득해 세계4대 기전을 석권하게 된다.우연이지만 이 두개의 사건은 미묘한상징성을 띠고 있었다.
도쿄에서 금의환향한 유창혁과 조훈현 앞에 희대의 승부사 이창호가 기다리고 있었다.이창호는 8월 막 세계챔피언에 오른 유창혁을 맞아 명인전에서 3대2로 승리했다.상승세의 유창혁이었지만어둠속에서 고요히 힘을 기른 이창호의 정신력이 좀더 강했다.
비슷한 시기에 조훈현-이창호의 국수전 도전기가 시작됐다.벼랑에 몰렸던 曺9단은 지난해 이창호에게서 국수를 탈환해 극적으로재기에 성공했다.이번엔 이창호가 빚을 받으러 왔다.제1국은 러시아의 볼가강.여기서 대국이 벌어지게 된 사연은 길다.
30년전,당시 홍안의 이창세3단은 당대 무적이었던 조남철의 국수위에 도전해 3대2로 패퇴한다.이창세는 굉장한 유망주였으나가난했던 바둑계에 비전을 느끼지 못했기에 곧 무일푼으로 독일유학길에 오른다.
이창세는 결국 서독에서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고 볼가강의 유람선을 사들여 러시아에 진출한다.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창세는 유람선 알렉산더호의 취항 첫 사업으로 국수전도전기를 유치한다.이제 머리는 백발이 됐건만 젊은 시절 헤맸 던 19로의환영만은 잊을수 없었던 것이다.
충암고 3학년생이던 이창호는 마침 대학을 가느냐 마느냐로 장고중이었다.대학을 가면 더 넓은 세계를 알 수 있다는 찬성파,바둑을 두는데 대학이 과연 필요하냐는 프로기사를 위주로한 반대파 사이에서 이창호는 고심하고 있었다.
이창호는 대학을 가더라도 특혜가 아니고 실력으로 가고싶었다.
그 시험이 임박해 있었다.또 장거리비행기 타기는 이창호가 가장싫어하는 것.
그러나 도전기는 치러야 했고,곡절끝에 이창호는 러시아로 떠났다.이런 이면은 숨겨진채 최초의 선상대국은 큰 화제를 끌었다.
김인9단.김희중8단.서능욱9단.천풍조7단 등이 부부동반으로 참여했고,수덕사 방장 원담스님 등이 노구를 이끌고 볼가강으로 떠났다.8월14일 고도 페테르부르크 앞에 알렉산더호가 정박했다.
오전10시 대국개시.러시아바둑클럽 사람들과 여행객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 기이한 시합을 구경하고 있었다.
풍류로서는 최상의 풍류였다.정취 가득한 항구에 멀리 극동에서온 동양의 이인(異人) 두사람이 괴이한 흑백의 향연을 벌이는데그 모습이 자못 엄숙하지 않은가.
그러나 여행중에 이창호는 밤이 되면 라면이나 김밥이 먹고싶었다.그의 아버지 이재룡씨는 밤마다 이방 저방 라면을 찾아 기웃거려야 했다.이창호는 선상카지노에서 블랙잭으로 소일했는데 처음해보는 도박에서 칩을 수북이 긁어모으고 있었다.
이창호는 승부의 본질에 철저한 선천적인 승부사였고,이 대국에서도 만가지 잡념을 끊고 깊이 몰두해 12집반의 대승을 거뒀다.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가 모처럼 여행의 즐거움에 흠뻑 빠졌던曺9단은 중반 이창호의 거센 공격을 받고 일거에 침몰해버렸다.
대국이 끝나자마자 이창호는 혼자 귀국했다.이튿날 한국기원.친구인 윤성현5단이 『오늘 시험날인데 안가니』하고 물었다.이창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이창호는 이미 바둑외길,승부외길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잠시의 혼란을 진정시킨 그는 곧 조훈현을 3대0으로 연파하고 국수를 탈환했다.
이창호의 태풍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이번 태풍은 예전의 태풍과 다르다는 것을 누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때마침 조훈현-이창호 사제도전기 22번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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