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 시시각각

워싱턴의 이재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재오 의원이 오늘 미국 워싱턴으로 떠난다. 한국의 여러 정치인에게 워싱턴은 추억의 도시다. 이명박 대통령, 손학규 민주당 대표, 이인제 전 대선후보,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포토맥 강물을 바라보며 재기를 꿈꿨다. 누구는 꿈을 이뤘고 누구는 못 이뤘다. 이재오는 7년의 감옥 생활, 3선의 영광, 낙선의 충격, 그리고 박근혜를 서울에 남겨놓고 떠날 것이다. 외국생활을 별로 겪어보지 못했다는 2인자 이재오…. 워싱턴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워싱턴에는 민주주의 권력의 질서가 있다. 워싱턴의 중심은 백악관이 아니라 국회의사당이다.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포토맥강을 건너면 링컨기념관이 있다. 링컨은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국민 통합의 대통령이다. 링컨은 거대한 석조 건물 안에 앉아 국회의사당을 쳐다보고 있다. 미국 의회민주주의의 수호신인 셈이다. 링컨기념관과 의사당 사이엔 내셔널 몰(National Mall)이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나에겐 꿈이 있다(I have a dream)”며 흑인 민권을 외쳤다.

미국을 만들기 위해 미국인은 피를 많이 흘렸다. 미국의 선조들은 영국과 혈전을 치러 1776년 신대륙에 민권국가를 건설했다. 새로운 자유·평등 사상은 대서양을 건넜고 1789년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미국의 건국은 인류사의 사건이었다. 미국인은 매년 7월 4일 화려한 불꽃놀이로 독립을 기념한다. 워싱턴 하늘의 불꽃이 가장 멋있다. 포토맥강 남쪽 언덕엔 유명한 이오시마 해병의 동상이 있다. 1945년 3월 미 해병은 지옥 같은 전투 끝에 일본섬 이오시마에 성조기를 꽂았다. 해병 6800여 명이 죽었다. 이오시마의 포연(砲煙)을 맡으며 미국 건국의 불꽃을 보면 조금씩 미국이 다가온다.

워싱턴에선 세계 속의 북한이 보인다. 한반도 전문가들은 쉴 새 없이 세미나를 열고 북한을 얘기한다. 남한에서 바라보는 북한은 동포지만 워싱턴에서 보이는 북한은 주민을 굶기면서 핵을 개발하는 조그맣고 이상한 나라다. 하버드대학 한 곳의 운용기금이 300억 달러가 넘는다. 이 돈이면 북한 경제를 두 번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워싱턴에는 세계은행(IBRD)이 있다. 이 앞을 지나면 북한이 생각난다. 그들은 언제 문을 열어 이곳에 도움을 청할 것인가.

워싱턴DC엔 흑인이 많다. 미국인 전체에서 흑인 비율은 20%가 안 되지만 이곳에는 흑인이 절반을 훨씬 넘는다. 고급 일은 주로 백인이 하고 허드렛일은 주로 흑인 몫이다. 워싱턴 남부 지역은 흑인 빈민촌이며 치안이 불안하다. 워싱턴은 미국의 어두운 구석도 보여준다. 오바마가 어렵게 꺼낸 인종문제가 어떤 얼굴인지, 그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뽑아내는 미국의 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워싱턴에서 알 수 있다.

워싱턴에는 퍼드러커(Fuddruckers) 햄버거 식당이 있다. 서민이든, 중산층이든, 아니면 매클린에 수백만 달러짜리 집을 가지고 있는 부자든 모두 이곳을 좋아한다. 남녀노소, 백인·흑인, 그리고 동양인 모든 사람이 햄버거 안에 들어있는 30개월 이상 된 쇠고기를 맛있게 먹는다. 이재오 의원은 교포 집에서 하숙으로 지낼 것이라 한다. 가끔은 퍼드러커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미국산 쇠고기, 한·미 동맹, 그리고 서울에 몰아쳤던 허위의 바람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워싱턴은 인연의 도시다. 세계 각국에서 온 꿈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 인연을 맺는다. 워싱턴의 인연은 모스크바로, 파리로, 베이징으로, 두바이로 이어진다. 어떤 것은 정신적 동맹으로, 어떤 것은 세속적 유대로 열매를 맺는다. 이재오에겐 어떤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까. 평생 이상한 재산을 모으지 않았고, 7년을 감옥에서 보냈는데, 손에 잡힌 권력 앞에서 기습적으로 좌절한 이재오. 은평구 지역구에서처럼 자전거로 구석구석을 돌면, 워싱턴은 세상의 속살을 보여줄지 모른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