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YS가 처음 털어놓은 남북관계 비화

중앙일보

입력

YS가 처음 털어놓은 남북관계 비화

“카터 평양행 못 막았다, 클린턴도 못 마땅하게 여겨”
“‘카터·김일성’ 회담 때 긴급상황 생기면 즉시 연락하겠다. 너무 걱정 말라” 전화 통화

1. 햇볕정책
- “문민정부 때 한완상 교수가 처음 써”

“남북교류나 협상에서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다. 어떻게 대가를 주고 김정일을 만나고, 정상회담하고 그러나? DJ 때부터 노무현 때까지 명색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북한에) 우르르 몰려가 사진 한 방씩 찍고 와서는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방에 걸어 놓고 했다.

노무현은 몇 번이나 졸라 김정일을 겨우 만났고, 그것도 두 번 연이어 찾아가 만났다. 그래 놓고 선물도 하나 없이 푸대접만 받고 돌아왔다. 송이버섯 받으려고 갔나?

사실대로 말하면 DJ가 마치 자신의 전유물처럼, 자신이 처음 내세운 것처럼 이야기하는 ‘햇볕정책’이 실제는 우리 때 나온 용어다. 문민정부 때 첫 통일부 장관이었던 한완상 교수가 처음 그 용어를 썼다. 그래서 내가 미전향수 이인모를 북으로 돌려보내고 했던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도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현 러시아)을 맨 먼저 방문한 내가 소련 수뇌급들과 협의를 했고,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타진했다.”

2. 지미 카터의 방북
- “카터 제안에 김일성이 매달려”

“1993년 들어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아주 강경하게 나갔다. 북한과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할 정도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북한의 핵 시설이 있다는 영변을 바로 때릴 수 있는 거리에 항공모함도 배치했을 정도였다.

이것이 김일성을 압박했고, 김일성은 완전히 겁을 먹었다. 항공모함이 불을 내뿜었다 하면 북한체제가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닌가?

김일성이 방법을 찾다가 결국 카터 대통령을 초대한 것이다. 카터가 북한 간다는 정보를 듣고 내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해, 카터 대통령의 방북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클린턴 대통령도 여러 가지로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미국 정부가 북한을 ‘어떻게 하겠다’ 이런 계획으로 항공모함도 띄우고 북한의 대응을 예의주시하는 상황인데, 카터가 나서면 대북 채널도 이상해지고 잘못하면 오히려 미국이 급한 것처럼 보이는 등 모양새가 이상해질 수 있었다.

게다가 한창 긴장 상태인데 김일성의 초청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카터의 안전도 보장을 못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미국도 이상한 것이, 미국의 전통은 전직 대통령이 하는 일에 현직 대통령이 간섭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 클린턴 대통령도 속은 타지만 카터가 북한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클린턴 대통령이 생각해낸 것이, 카터가 북한에 갈 때 한국 여성과 결혼해 우리말을 잘하는 주한 미 부대사, 바로 그 사람, 리처드 크리스텐슨을 통역관으로 딸려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의 명분은 김일성과 둘이 만나면 말이 안 통하니 배려해 주는 것처럼 했지만, 사실 카터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러면서 클린턴이 나보고 ‘두 사람이 만나는 동안 긴급한 상황이 있으면 즉시 연락하겠다’면서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런데 카터가 평양에 가기 전에 나한테 연락을 했다. 박정희 정권 때 나와 단독으로 만난 적이 있어서 그 전부터 나는 카터를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하룻밤 자고 평양으로 들어가는데, 나를 먼저 만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도 이 사람이 엉뚱한 소리를 할까 생각돼 청와대에서 부인 로절린, 집사람(손명숙 여사) 이렇게 네 명이 통역만 두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2시간을 넘게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카터는 참 말이 많았다.

그런데 핵심은 별로 없었다. 자기가 북한에서 두 번 김일성을 만나게 돼 있고 결과를 나한테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여하튼 김일성을 두 번 만나고 서울로 왔는데, 오기 전날 평양 대동강에서 카터 부부와 김일성 부부가 함께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 때까지도 세계는 김일성의 부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누구인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김성애라는 여자가 세계에 알려졌다. 뱃놀이를 하는데, 좀 전에 이야기한 대로 김일성이 아주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이 보이더란다. 그래서 카터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당신이 우려하는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클린턴 대통령이 아닌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뿐이라고. 그랬더니 망설임도 없이 대번에 매달리더라는 것이다. 당장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김일성이 그렇게 나오니 카터도 좀 놀랐을 거 아닌가?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한테 정식으로 정상회담을 제의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카터도 나한테 의사를 물었다.

거부할 이유가 없고 또 저쪽이 급하다고 하니 ‘올바른 태도로 나오면 언제라도 도와줄 마음이 있다. 내가 받아들이겠다’고 그랬다. 그리고 바로 대변인을 불러 발표한 것이다. 또 그것이 전 세계 뉴스로 나간 것이다. 당시에는 최대 관심사였으니까.”

3. 남북정상회담 무산
- “우리 제안 다 수용하는 분위기였는데…”

“내가 재임하면서 있었던 일 중 제일 안타까운 일은 정상회담 2주일을 남겨놓고 김일성이 죽은 것이다. 그때 만났으면 김일성이 굉장히 많은 부분을 반성하고 내가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국군포로 문제라든가, 납북 어부들이라든가, 더 올라가 6·25남침까지 전부 사과하고 돌려보내는 등 다 가능했을 것이다.

방북하기 전에 사전 교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시 크게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먼저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이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내가 요구하는 대로 다 듣겠다고 했다.

그때는 북한의 태도가 180도 달랐다. 카터가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온 6월19일, 나한테 (김일성과의) 정상회담 부탁을 받고 왔다고 했다. 그 때부터 이홍구 통일원 장관과 북한의 김용순 아태위원장이 왕래하면서 정상회담 일정과 내용을 협의했다.

그래서 합의한 것이다.

심지어 그 때까지는 북한을 모르니 경호문제가 걱정이 됐는데, 그것도 전부 우리 경호원을 다 데리고 와도 된다고 했다. 그만큼 당시에는 북한이 우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완전 합의를 봤다.

그런데 2주일 남겨놓고 죽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더라. 참 아쉬웠다. 그때 김일성을 만났다면 한국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당시 김일성 타살설 등이 나돌았다. 일본 신문을 통해 보니 ‘김정일이 이복동생에게 자리를 빼앗길까봐 제거했다’는 등, 미국 언론에서도 말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매주 정보보고를 받았는데 그런 내용은 없었다. 우리가 수집한 정보랑 해외에서 들어온 정보를 전부 보고받았기 때문에 그런 낌새가 있으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낭설만 구구했지, 구체적인 정보가 없었다. 나도 갑작스럽게 죽었으니 상당히 궁금해서 알아보라고 했는데….”

글■김민규 월간중앙 기자 (min138@empal.com)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 [J-HOT] 더 타임스 "박지성 제외 퍼거슨에 한국인들 부글부글"

▶ [J-HOT] "중국갈 때 라이터 집에 놔두세요"

▶ [J-HOT] '미간 33㎜' 미스코리아 얼굴의 비밀

▶ [J-HOT] 돌아서면 배고팠다, 그런데 속은 편안했다

▶ [J-HOT] 산업·우리·기업은행 팔고 ‘신보+기보’ 통합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