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아이콘’ 체 게바라, 스크린을 달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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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삶을 다룬 영화 ‘체’의 한 장면. 아래 사진은 22일 칸 영화제 포토콜에서 포즈를 취한 주연배우 베네치오 델 토로(왼쪽에서 셋째)와 줄리아 오몬드(왼쪽에서 첫째) 등 여성 출연자들. [칸(프랑스) AP=연합뉴스]

제61회 칸영화제(14~25일)가 후반전으로 접어들었다. 장편 경쟁부문에 초청된 총 22편의 영화 가운데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에 대한 기대감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장장 4시간 28분에 달하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경쟁부문 진출작 ‘체’가 후반부에 접어든 칸에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 21일(현지시간) 열린 시사회에서는 15분간의 중간휴식 뒤에도 대부분의 기자가 자리에 돌아오는 열기를 보였다.

‘체’(주연 베네치오 델토로)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주도했던 의사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역사적인 평가는 둘째 치고, 젊은이들의 티셔츠에 흔히 등장할 만큼 아이콘이 된 인물이다.

예술영화와 상업영화 사이를 솜씨좋게 왕래해온 소더버그 감독의 연출력은 이번에도 유려했다. 체 게바라를 전형적인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반세기가 지나도록 혁명적 열정의 상징으로 자리해온 한 혁명가의 매력을 스크린에 듬뿍 담아냈다. ‘체’는 그의 삶의 세 시기를 2부로 나눠 스크린에 그려낸다. 1부는 1958년 쿠바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 체와 혁명 성공 이후 쿠바의 대표로 64년 UN연설을 위해 미국 뉴욕을 방문한 체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준다. 사실 심한 천식증세를 비롯, 타고난 싸움꾼이라고 보기 어려운 체는 부대 내에서도 처음에는 ‘의사’로 불린다. 점차 ‘코만단테’, 즉 부대의 지도자가 되어서도 체는 게릴라에 지원한 가난한 청년들에게 글을 배우도록 독려하고, 군대 특유의 강압이 아니라 자발적 책임을 게릴라의 특징으로 삼아 부대를 이끌어나가는 지도력을 고수한다.

영화는 이런 에피소드들에 해석을 덧붙여 의미를 강요하는 대신, 무심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이 인물의 독특한 매력을 오히려 부각시킨다. 흑백으로 촬영된 64년 미국 방문 장면은 기자와의 인터뷰나 유엔 연설을 통해 그를 혁명에 투신하게 한 열정을 구체적인 발언으로 전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혁명의 핵심을 묻는 질문에 ‘사랑’을 꼽는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얘기다. 혁명 이후 쿠바가 겪은 또 다른 고통은 가족이 처형당하고 미국으로 탈출한 쿠바인들의 시위를 통해 짐작하게 한다.

2부는 미국방문 이후인 67년, 마치 잠적이라도 한 듯 행방이 불투명해진 체 게바라가 신분을 감추고 또 다른 남미국가인 볼리비아에서 새로이 게릴라전을 벌이는 모습을 담아냈다. 알려진 대로, 체 게바라는 68년 이곳에서 붙잡혀 죽음을 맞이한다.

드라마적 재미로 보면 결말을 아는 것만큼 싱거운 일도 없는데, 소더버그는 체 게바라의 삶의 마지막 1년간을 여느 장편영화 한 편에 해당하는 분량에 담아낼 만큼 비중을 두고 공들여 묘사한다.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대한 공분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쿠바에서와 달리 볼리비아에서의 게릴라전은 농민들의 자발적인 동조도 시원치 않고, 더구나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 게릴라 내부에서도 여론의 반감을 사는 요소로 작용한다. 미국이 CIA를 통해 본격적으로 개입에 나선 것 역시 쿠바혁명 때와는 크게 달라진 상황이다.

소더버그는 2부를 통해 1부에서 거둔 승리의 특징을 반추하는 한편, 최고권력의 과실에 안주하는 대신 혁명의 열정으로 살고 싶어했던 인물로서 체 게바라의 초상을 완성해낸다. 마치 인디밴드로 시작해 수퍼스타가 된 뒤, 백만장자 유명인으로 사는 대신 다시 인디무대로 돌아가 낭만적 신화가 된 초상이다.

2부는 1부보다 흡입력은 떨어지지만, 체 게바라의 신화를 온전히 조망하려는 소더버그의 야심 찬 의도는 한결 뚜렷해진다.

상영 다음날 회견에서 소더버그는 “그는 20세기의 가장 열정적인 인간”이라며 “그가 (혁명을 위해) 두 차례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는 점에 특히 끌렸다”고 말했다.

베네치오 델 토로는 혁명성공 당시 불과 30세, 그리고 38세에 죽음을 맞은 이 신화적 아이콘을 매력적으로 연기한다.

‘체’는 고르게 압도적인 호평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 체 게바라의 내면적인 갈등을 사실상 거세하다시피 했고, 혁명 전후의 시대상황에 대한 평가 역시 완결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4시간여의 상영시간 동안 극적인 재미의 호흡을 이어가는 이 영화의 힘은 19년 전 신인 감독 소더버그의 데뷔작(‘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에 황금종려상을 안겨주었던 칸의 선택이 해프닝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칸=이후남 기자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대표작 ‘섹스, 거짓말, 비디오 테이프’(1989)로 선댄스 영화제, 칸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카프카’ ‘에린 브로코비치’ ‘오션스 일레븐’ ‘솔라리스’ 등의 작품이 있다. ‘트래픽’(2001)으로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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