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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는 매너로 시작해 매너로 끝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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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는 매너로 시작해서 매너로 끝난다.’

참으로 다행이다. 구력 10년에 아직 100파를 못하고 있는 타고난 몸치도 매너만 수양하면 골프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행히 머리를 올리던 날부터 ‘볼은 못 쳐도 매너는 좋아야 한다’며 혹독한 에티켓 교육을받았던 터라 그간 크게 골프 매너를 걱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나 골프라는 운동이 신사의 운동인지라 여성 골퍼에 대한 배려는 남달랐다. 여성은 클럽하우스에서 모자를 써도 무방하고 반바지도 입을 수 있는 등 치외법권 영역이 많았다. 그래서 벙커나 디봇 손질 등 기본적인 에티켓만 준수하면 동반자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골프의 본고장에서, 그것도 어느 골프장을 가더라도 이방인으로 주목을 받는 입장에서는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뒷 팀이 따라오면 진행 속도를 많이 의식했고, 그린에서는 남의 디봇까지 죄다 수리하고 벙커 하나를 통째로 다 일구고 나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각자 한 번씩 에티켓에 관해 지적을 받은 전적이 있었다. 남편은 런던 근교 한 골프장에서 티오프에 앞서 화장실을 찾느라 클럽하우스로 들어갔다가 무심코 쓰고 있던 모자 때문에 모여계시던 할아버지 멤버들에게 집단 지적을 받았다. 물론 그 순간에도 “스미마셍(すみません)”을 외치며 조국의 명예를 지켜내는 불타는 애국자의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이후 골프 에티켓에 대해 상당히 주눅이 드는 계기가 되었다.

나 역시도 골프화를 신고 클럽하우스에 생수를 사러 들어갔다가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과거, 골프화에 쇠 징이 박혀 있었을 때에는 실내의 카펫이 훼손될 수 있었기 때문에 클럽하우스 내에서 골프화 착용이 금지 되었다. 하지만 골프화가 플라스틱 징으로 바뀐 요즈음에도 그렇게 깐깐하게 굴어야 하는지… 한국에서야 동반자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필드로 나가는 경우에는 의례 골프화를 신고 클럽하우스 출입을 하기 마련이었다.

일면 피부색 다른 우리들에게 유독 텃세를 부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뒤이어 필드에서 들어온 젊은 청년 팀이 맥주를 시키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면서 골프화를 아예 레스토랑 입구에 벗어버리고 양말만 신은 채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인종차별에 대한 피해의식은 지울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골프는 영국인들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스포츠가 아닌가 싶다.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약속을 중시하고, 양심과 정직을 생명처럼 생각하고… 아마도 골프가 영국 태생이 아닌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태생이었다면 아마도 화끈하고 자유분방한 스포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 차례씩 매너 불량으로 지적을 받은 전적이 있어 깐깐한 영국 할아버지 멤버들에게 대략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을 즈음, 골프 매너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하는 계기가 있었다. 잉글랜드 남동부의 켄터베리 근교, 체스트필드(Chestfield) 골프장이라는 시골 골프장이었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클럽하우스가 있다는 말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었는데 마침 그날은 여성 멤버들의 챔피언십이 개최되고 있어 평일 임에도 멤버들이 많았다. 역시나 우리에게 이목을 집중되었다. 15세기 초에 건축되었다는 영국 최고령의 통나무 클럽하우스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옆 테이블의 멤버들과 자주 눈이 마주쳤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들 인사를 건내왔다. 시골 골프장일수록 이방인의 출입이 드물다 보니 유독 우리에게 관심을 많이 갖나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필드에서 만나게 되는 앞 팀, 뒷 팀, 혹은 스쳐지나가는 다른 홀 경기자들도 다들 인사를 건내오고, 슬라이스 난 볼 위치를 알려주고, 못 찾으면 직접 달려와 찾아주기도 하고, 어디서 왔느냐, 어떻게 왔느냐… 영국인답지 않게 지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영국인들이 대부분 친절하기는 하지만 이 지역 주민은 상상 이상이었다.

후에 물어보니 그것은 그 골프장에서 일종의 문화로 정착해 있는 매너라고 했다. 'Chestfield Manner'라 명명하여 골프장을 방문한 게스트들에게 따뜻한 친절을 베풀자는 로컬 매너는 영국 내 다른 지역에도 알려진 유명한 친절이라고 했다.

덕분에 우린 오랜만에 맘 편안한 라운드를 즐겼고 훗날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은 골프장 리스트에 체스트필드 골프장을 올려 놓았다. 결국 골프 매너는 쌍방이 즐거워야 하는 것 아닌가.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