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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부패의 종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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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4면

18세기 건륭제(乾隆帝)가 중국을 통치하던 시대는 빛나는 시대였다.그는 61년간 제위(帝位)에 있으면서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통치했다.몽고.버마.대만.베트남 등 주변지역을 영토화하거나 조공(朝貢)을 바치도록 했다.
만년(晩年)에 그는 자신이 변경(邊境)에 10차례나 출병,전공(戰功)을 세웠음을 자랑해 십전시(十全詩)를 짓고 스스로 「십전노인」이라 불렀다.
건륭제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자작시(自作詩)가 4만2,000여수(首),문장이 1,000편을 넘는다.
또 대규모 편찬사업을 벌여 주요서적들을 경(經).사(史).자(子).집(集) 4개 분야 총3만6,000여권으로 집대성했다.
유명한 『사고전서(四庫全書)』다.
그는 고매(高邁)한 사람이었다.오전에 정무(政務)를 마치면 책을 읽고 시를 짓거나 학자들과 토론하며 오후를 보냈다.
저녁식사는 간단한 다과(茶菓)로 그치고 술은 마시지 않았다.
당시 중국에 머무르던 예수회 신부들은 「철인황제」의 얘기를 유럽에 전해 계몽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간중 마지막 20년은 재정난.사치.부패가 극심했다.건륭제가 65세 되던 해 시위(侍衛)로 있던 화신(和)은 황제의 눈에 들어 총애(寵愛)를 받았다.몇년 뒤 의정대신(議政大臣)이 되고 황녀를 며느리로 맞을 만큼 세 력이 커졌다.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1796년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진압 책임을 맡은 화신은 막대한 군비(軍費)를 착복했다.
화신의 전횡(專橫)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건륭제는 끝까지 그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았다.
드디어 건륭제가 죽자 뒤를 이은 가경제(嘉慶帝)는 화신을 붙잡아 20개 죄목(罪目)을 들어 자결을 명했다.몰수된 재산이 은 5,000만냥,전당포 75개,모피 7만벌 등 총10억냥이나됐다.당시 정부 세입(歲入)은 7,000만냥이었 다.『화신이 죽으니 황제 배가 가득』이라는 민요까지 나왔다.
지금 세상은 온통 수천억원대 비자금 얘기다.부정한 돈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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