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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49.문서에 나타난 韓美관계 6.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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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70년대의 한-미관계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었다.근본원인은 주한미군 철수 때문이었다.닉슨 미국대통령은 아시아에서 제2의 월남전과 같은 사태가 발생해 미국이 또다시 원치 않는 군사개입을 하게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주한 미군 철수를단행했다.또 카터 미국대통령은 한반도에서 긴급사태가 발생할 경우 미국이 자동적으로 분쟁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아래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유신체제를 출범시켜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한박정희(朴正熙)정권에 대한 압력차원 에서 철군을 단행한 측면도강했다.한-미 두 나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 수밖에 없었다.이같은 양국의 외교마찰은 미국 대통령 기념도서관 소장문서들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69년7월25일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국가들은 미국의존도를 줄이고 그들의 안보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기 바라며 미국이 또다시 월남전과 같은 사태에 말려들지 않도록 협조해야 한다』고 선언했다.미국이 아시아에서 발을 빼겠다는「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것이다.
곧 이어 닉슨 대통령은 미국측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69년8월21~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박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이자리에서 닉슨 대통령은 『한국은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상당한 정도의 방위력을 성장시켰다.이제 한국도 스스 로의 안보를 책임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주한미군 철수 의사를 내비쳤다.
이 회담이 열리기 1시간 전 닉슨 대통령은 윌리엄 포터 주한미국대사와 만나 『나는 의회의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주한미군 철수를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고 말했다.박대통령과의 회담은바로 이러한 미국내 분위기를 전달하려는 자리였다 .
70년3월20일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미국 국가안보결정 비망록 48」이 확정됐다.국무부.국방부.합동참모본부.중앙정보국(CIA)등 미국정부 주요 부서의 의견을 종합한 것이다.이 비망록에 따르면 닉슨 행정부는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대신 한국군 현대화계획을 추진한다.이를 위해 71~75 회계연도중 매년 2억달러의 군사원조와 5,000만달러의 경제원조를 한국측에 제공하도록 의회의 승인을 얻는다』고 철군에 따른 대안을마련했다.
70년8월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한-미교섭차 애그뉴 미국 부통령이 서울을 방문했다.박-애그뉴 회담은 애초 1시간으로 예정돼 있었지만 6시간으로 연장됐다.박대통령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애그뉴 부통령은 『미국은 의회와 행정부의 협력으 로 대통령의외교정책이 성립된다』며 주한미군 철수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박대통령은 『철군의 부당성에 대한 나의 얘기를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반복 요구했다.
미국측의 입장은 확고했다.애그뉴는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5년이내에 주한미군 전병력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미국측은 71년3월27일부터 주한미군 7사단의 철군을 강행했다.그해 6월말까지 주한미군 6만1,000명중 2만명이 한국 을 떠났다.
불안감을 느낀 한국정부는 미국 행정부및 의회를 상대로 활발한로비활동을 전개했다.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코리아게이트」였다.76년10월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미국의 언론매체들은 『한국정부가 주한미군 철수연기와 유신체제에 대한 미국의 이해를 얻기 위해 박동선(朴東宣)이라는 로비스트를 내세워 미국행정부 관리와 의원들을 상대로 수백만달러의 뇌물공세를 펼쳤다』고 폭로했다.
카터 행정부의 출범은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대통령선거유세 때부터 카터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인권상황과 연계해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그는 취임한지 한 달도못된 77년2월15일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미국 대사를 통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의사를 박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박대통령은 77년2월26일 답신을 보냈다.카터 대통령 문서철에 포함돼 있는 이 친서에서 박대통령은 『주한미군의 감축은 미국의 방위공약에 대한 오판을 야기하거나 한반도에서의 군사력균형을 저해할 수 있다.우리의 자주국방능력이 아직 불 충분한 현단계에서 주한미군의 병력수준에 변동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철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은 이 요청을 뿌리치고 그 다음달 『주한미국지상군을 4~5년에 걸쳐 철수시키겠다』고 밝혔다.77년5월5일자 「카터대통령 메모」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78년말까지 1개여단을,그 다음 지원부대를,마지막으로 전투여단과 본부를 82년까지 철수시킨다』고 철군일정을 잡았다.
77년5월29일 주한 서전트미사일대대가 철수를 완료했다.그해7월 이후에는 2개 미사일대대 총 1,023명의 주한미군이 한국을 떠났다.78년11월22일에는 주한미국지상군 5백명의 철수가 단행됐고 다음달에는 전투부대 1진 219명이 오산기지를 떠났다. 카터 행정부의 철군정책은 77년 여름부터 미국의회의 반대에 부닥쳤다.78년5월 미국상원의 전공화당 의원들은 주한미군철수계획의 번복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이런 분위기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추진됐다.
청와대에서의 한-미정상회담은 79년6월30일과 7일1일 두 번 개최됐다.이 회담에 참석한 사이러스 밴스 미국 국무장관은 『박대통령은 1차회담에서 철군정책을 통렬히 비난하며 그같은 정책이 한반도에 얼마나 위험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 해 45분 동안 설명했다.카터 대통령은 노여움을 억누르고 있었다』고 말했다.두 정상간의 회담이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음날 열린 2차회담에서 카터 대통령은 『한국이 시민적 자유를 외면함으로써 한국안보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저해하고 있다.
인권상황을 개선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해제하라』고 박대통령에게 강도 높게 요구했다.박대통령은 『그 문제는나에게 맡겨두면 적절한 시기에 조치하겠다』고 대답함으로써 논쟁을 피했다.
카터 대통령은 회담 직후인 79년7월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동결했다.한국의 요구를 수용했다기보다 미국의회를 비롯한 미국내 철군반대여론 때문이었다.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도 일단 사라졌다.
그러나 YH무역 농성여성근로자 강제해산사건과 당시 김영삼(金泳三)신민당총재의 국회제명처리 등으로 인해 한-미간의 긴장관계는 풀리지 않고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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