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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신화 주역 변화보다 안정에 역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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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28면

삼성전자가 12년 만에 새 선장을 맞게 됐다. 1997년부터 총괄대표이사를 맡아온 윤종용(64) 부회장이 상임고문으로 물러나고, 이윤우(62·사진) 부회장이 총괄대표이사에 올랐다. 14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삼성 계열사 사장단 인사가 발표되자 재계에선 다소 의외란 반응이 나왔다. 윤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전략기획실장(부회장)의 퇴진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할 것이란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윤 부회장은 “후진에게 길을 열어주겠다”며 자리를 내놓았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윤 부회장은 아름다운 퇴장을 늘 준비해 왔다”며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전했다.

삼성전자 이끌 이윤우 부회장

“덕장으로 따르는 후배 많아”

삼성전자는 이번 사장단 인사에서 6명이 자리바꿈을 했다. 하지만 내막을 보면 윤 부회장의 경영 일선 퇴진에 따른 순환 인사 성격이어서 회사 경영체제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사장단 인사 발표 당일 이윤우 부회장은 이미 잡혀 있던 미국 출장을 떠나 아직 총괄대표이사 취임 일성을 내놓지 못했다. 삼성 안팎에선 그가 기존 경영방침을 바꾸기보다 조직 안정에 역점을 둘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덕장으로 정평이 나 있어 따르는 후배가 많다”며 “삼성전자라는 거대 조직이 안고 있는 갈등을 조율하고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고위 임원도 “삼성전자의 각 사업부문 총괄 사장은 흡사 경쟁사끼리 다투듯 치열하게 실력을 겨룬다”며 “이 와중에 불거지는 불협화음을 이윤우 부회장만큼 잘 조율할 수 있는 인물은 없다”고 평가했다. 현재 삼성전자 최고경영진 대부분은 그가 반도체총괄 사장 시절 보조를 맞추던 인물들이다. 삼성 밖의 시각도 마찬가지다. 굿모닝신한증권 김지수 애널리스트는 “이 부회장이 이끈다고 해서 삼성전자가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며 “삼성전자 경영진은 안정적으로 조직을 이끄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부회장은 삼성의 반도체 신화 창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68년 삼성전관(삼성SDI)에 입사한 그는 삼성의 반도체사업 진출 초기인 76년 반도체 생산과장을 맡아 기술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기흥공장장 시절 256K D램과 1메가 D램 양산을 성공리에 해냈고, 반도체총괄 상무·전무·부사장에 이어 96년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그가 닦아 놓은 기반 덕분에 진대제·황창규 등 반도체 스타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이 부회장은 반도체총괄 사장 시절 기흥 공장에서 수요일마다 공정회의를 열었다. 당시 삼성은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7-4제’를 하고 있었을 때인데도 오후 7시에 회의를 시작해 끝장 토론을 했다. 이런 그의 집념이 반도체 부문의 기술혁신을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이 부회장은 2004년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반도체총괄 사장에서 물러난 이후엔 기술총괄과 대외협력담당의 직책을 맡아 왔다.

그는 반도체 전문가로 대내외 지명도가 높다. 앤디 그로브 전 인텔 회장을 비롯해 델컴퓨터의 창업자 마이클 델, 애플컴퓨터의 스티브 잡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스콧 맥닐리 회장 등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의 거두들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 2004년 10월 썬마이크로시스템즈 본사의 아시아·태평양 총괄 책임자가 회사를 떠나게 되자 태평양을 건너왔다. 순전히 이 부회장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유원식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 사장은 “총괄 책임자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부회장만큼은 꼭 얼굴을 보고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며 한국을 찾아왔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은 친구들 사이에서 ‘신사 중의 신사’로 불린다. 이 부회장의 서울대 전자공학과 동창인 차동완 KAIST 정보미디어경영대학원장은 “이 부회장은 소탈하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친화력이 좋아 주변에 친구가 많다”며 “아랫사람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포스트 윤종용’ 경쟁은

업계에선 이 부회장이 윤 부회장만큼 최고경영자(CEO)로서 장기 집권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무엇보다 60을 훌쩍 넘긴 나이를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삼성은 전통적으로 60세를 넘긴 CEO가 많지 않았다. 64세로 CEO에서 물러난 윤 전 부회장은 극히 드문 사례다. 지난해 상반기 60세를 넘긴 계열사 CEO들이 그룹 창업 70주년(올 3월 22일)을 맞아 자진해 자리를 내놓겠다는 결의를 다졌으나 삼성 특검 사태로 미룬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삼성의 전통을 감안할 때 이 부회장도 자리에 연연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최근 몇 년 전부터 총괄 사장 간에 벌어졌던 ‘포스트 윤종용’ 경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한 재계 인사는 “이 부회장은 윤 전 부회장과 같은 세대로 봐야 한다”며 “단 한번도 이 부회장은 윤 부회장의 후계자로 거론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윤 전 부회장의 후계 경쟁은 유효하다는 얘기다.

한편 삼성전자가 16일 내놓은 임원 승진 인사도 변화보다 안정에 역점을 뒀다는 평가다. 삼성 관계자는 “방향타 역할을 했던 전략기획실의 해체로 독자 경영에 나서야 할 삼성전자로선 모험적인 인사를 할 수 없는 노릇 아니냐”고 되물었다.

이날 인사의 부사장·전무 승진자 31명을 추려내 분석한 결과 이공계 출신 기술·연구직의 승진이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공계 출신자가 17명으로 상경계(6명)·인문계(3명) 등을 압도했다. 또 기술·연구직 종사자가 13명으로 관리직(6명)과 영업·마케팅직(6명)을 따돌렸다. 학벌을 따지지 않는 삼성의 인사 풍토도 재확인됐다.

서울대 출신이 부사장 승진자(5명)엔 하나도 없었고 전무 승진자에만 7명이 있었다. 그나마 연구임원 4명과 전문임원(변호사) 1명을 빼면 경영임원은 2명뿐이다. 성균관대·건국대·부산대 출신 경영임원 수와 같다. 이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서울대 출신이 머리를 쓰는 연구직에서는 고위직에 진출하는 확률이 높지만 때때로 궂은 일을 해야 하는 관리·영업 분야에선 잘 배겨내지 못한다”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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