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그를 오해했죠” -‘취화선’ 대역 한국화가 김선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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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06면

김선두(사진 왼쪽 50·중앙대 한국화과 교수)씨는 오원 장승업과 큰 연을 맺은 화가다. 2002년 영화 ‘취화선’ 촬영 때 오원이 그림 그리는 장면의 대역을 맡으며 그의 영혼을 맞아들이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화면 속에서 장승업으로 분한 이는 배우 최민식이었지만 실제 붓을 들고 일필휘지하는 대목의 손과 팔은 김선두 화가의 것이었다.

“‘취화선’에는 여러 명의 동양화가가 힘을 보탰습니다. 준비 단계에서 자문 역을 하셨던 일랑 이종상(당시 서울대 박물관장) 선생이 후배들을 불러 모아 도움을 청하셨는데 어찌하다 보니 제가 오원 역에 낙점되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전작 ‘서편제’가 개봉했을 때 국악 붐이 일지 않았습니까. 당시 한국화가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나돌던 때라 총대 메는 심정으로 덜컥 승낙했지요.

‘취화선’이 극장에 걸리면 한국화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높아지고 우리 그림을 사랑하는 감상층이 많아지리라는 바람이 컸지요. 미술대학에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도 서양화만 바라보는 현실에서 대중매체의 힘을 빌려 한국화의 매력을 널리 알리자는 마음에서 출연료도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2년여 개인 작업을 버려두고 영화에 매달리면서 김선두씨는 오원을 재발견하는 눈을 얻었다. 중국 그림을 모사하는 수준이라고 오해하고 있던 오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씻어내게 됐던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 제 짧은 안목으로 오원 그림을 내심 폄하하고 있었어요. 화가를 굳이 셋으로 나누자면 지적인 화가, 기술적인 화가, 감성적인 화가라 할 수 있는데 오원은 철학이 빈곤한 기술적인 화가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겁니다. 구한말의 혼란기에 중국 그림에서 벗어나 서구 회화까지 아우르며 당당하게 세계에 설 수 있는 독자적인 우리 그림을 왜 그는 창조하지 못했을까, 아쉬웠습니다. 테크닉만 뛰어난 그림 기계가 아닌가 싶었던 거죠.”

촬영이 이어지면서 김선두씨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오원의 그림 세계가 열리는 체험을 했다. 모사하면서 온몸으로 그의 그림을 받아들이다 보니 오원은 단순히 중국 그림을 베낀 화가가 아니었다. 형태를 통해 한국화의 맥을 쭉쭉 뻗어가게 하고 있는 힘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아, 이 양반 그림 속에 우리 것이, 우리 피가 있구나’ 깨달음이 오더군요. 특히 말기작으로 갈수록 그림이 묵직해지면서 기교가 안으로 스며들어 잔잔한 여운이 가슴을 치더군요. 기교를 뛰어넘은 졸박함이랄까요. 바둑으로 치면 날렵하면서도 막힘이 없는 이세돌 기풍이랄까. 중간 톤 먹이 젖어드는 오원의 화면에서 저는 큼직한 울림을 느꼈습니다.”

김선두씨는 왜 오원의 삶과 그림을 기록한 글이 그렇게 없을까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장승업이 천민 출신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당대 최고의 실력으로 인정받았고, 돈푼깨나 있는 가문치고 그의 그림이 걸리지 않은 집이 없었지만 지식인층과 사대부 주류 화단에서 무시당한 탓이겠지요. 오원 스스로 학식이 없어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점도 있고요. 그 호방한 성격에 기록 따위에 연연했겠습니까마는.”

그는 기이했던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양동 마을에서 사생을 하는 장면을 찍는데 평소 흰 잠자리를 그리고 싶었던 화가 앞에 거짓말처럼 흰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더니 날아가지 않았다. 취한 듯 비틀거리다가도 화가가 손을 들면 단정한 자세로 꼼짝 않고 머물러 이상하다 싶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그 잠자리가 곧 오원의 넋이 아니었나 싶더라는 것이다.

“영화가 개봉하고 난 이듬해 봄에 ‘취화선’에 힘을 보탰던 화가 7명이 ‘취화선, 그림으로 만나다’는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모두 오원을 기리는 작품을 냈는데 거기에 제가 이런저런 체험과 생각을 담아 출품한 것이 ‘취화선, 흘러가라’였습니다. 조선 화가 오원의 맥을 잇는 일은 이제 저희 몫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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