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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북카페] 남녀가 하나로? “환상일 뿐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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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사랑을 소통의 한 형태로 간주할 경우 서로 신호를 보내고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앙포토]

사랑의 코드
크리스티안 슐트 지음, 장혜경 옮김
푸른숲, 340쪽, 1만3000원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문학사에서 “낭만적인 사랑을 순도 100%로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젊은 베르테르…』에서도 가장 낭만적으로 꼽히는 장면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름다운 사랑 얘기라도 펼치려는 것일까.

근데, 그게 아니다. 느닷없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을 통해 괴테는 사랑이란 이상한 게임이며, 게임이란 특정한 규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그렇다. 이 책은 가슴 설레게 하는 연애의 비법 따위를 담아낸 ‘이쁘고 착한’ 책하고는 거리가 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은이는 사랑을 마치 과학 실험실의 차디 찬 금속 테이블에 눕혀 놓고 해부하듯 냉철한 분석을 시도했다. ‘사회학’이란 칼을 들고서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소통’이며, “근대 초기의 발명품”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도 태고적부터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립과 자의식, 즉 개성에 가치를 두기 시작한 현대에야 대두됐다고 그는 말한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사회가 현대화할수록 비개인적 소통의 영역은 늘어났다. 사람들은 직장을 다니고, 지하철을 타고,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고, 은행에 가고, 휘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지만 이런 영역에서 우리는 “특정한 지위나 기능으로 등장할 뿐 온전한 인격체로 인식되지 않는다.” 환경이 이렇게 변화하면서 개인은 자신의 존재가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랑’이라는 소통에 더욱 매달리게 됐다. “사랑에서는 개인의 온갖 특성이 최고의 가치를 누리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는 소설이 ‘낭만적 사랑’이라는 개념을 유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면, 20세기에는 영화와 텔레비전, 음악 등 대중매체들이 사랑의 모델을 만들고 전파했다. 오늘날에는 ‘온라인’공간이 사랑의 모델을 만들고 유포하는데 중요한 매체로 떠올랐다. 여기서 현대인들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전시하고, 자신들이 실천하는 ‘낭만적 사랑’을 연출한다.

그러나 저자는 현대인들이 사랑에 지나친 기대를 걸면서 큰 딜레마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사랑을 통해 타인이 바라보는 세계에 빠져들면서 일종의 ‘자기 소외’가 빚어지고, 애정 표현이 지나쳐 ‘인플레이션’을 겪는다는 것이다. 자의식이 강해지면서 더욱 늘어난 ‘싱글’들도 위기에 처해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구속받지 않는 생활과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감정의 양립”이라는 근본적 모순을 겪고 있다. 미국 TV시리즈 자아실현과 낭만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방황하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여주인공들이 대표적인 예다. 현대의 사랑은 “‘나-주식회사’와 낭만적 동경이 벌이는 소모적인 힘겨루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사랑의 미래를 어떻게 진단했을까. 생각보다 답은 원칙적이다.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둘이 만나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은 접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란다. 그도 이게 단순하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책의 곳곳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독설’은 신랄하다. 쿨하다 못해 차갑게 들릴 정도다. 그러나 특유의 통찰력으로 사랑을 날카롭게 파헤쳤다는 점에선 알랭 드 보통을 닮아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단,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간직하고 싶은 사람들은 읽지 마시길.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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