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정일의 新택리지] 임진강변 '징파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북삼리 임진강 변에 옛날엔 징파도(澄波渡)라는 나루가 있었다. '고려사''지리지'에 '장주에는 징파도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봐선 아주 오래된 나루였다. 하지만 지금은 나루터 흔적만 남아 있다. 그 옛날엔 분위기도 꽤 그윽했나 보다.

고려 후기 문신 배중부(裵仲孚)의 시를 보자.

'징파 강물에 이끼 낀 바위 잠겼는데, 가랑비 비낀 바람 손의 배를 보내네. 맞은편 언덕 고기 잡는 마을에 술 있는 걸 알았으니, 흥이 나면 봄옷 맡기기 알맞겠네'. 한 폭의 동양화가 연상된다.

지금은 사라진 옛 나루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옛날 여기서 벌어진 일화 때문이다. 조선 중기 유학자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에 나온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양반집 귀부인들이 난을 피하려 징파도에 이르러 배를 먼저 타려고 두 손으로 뱃전을 잡았다. 한 부인이 여종을 데리고 왔는데 배에 오르지 못하자, 뱃사공이 그 부인의 손을 잡아당겨 올리려고 하였다. 부인이 크게 통곡하며 "내 손이 네 놈의 손에 욕을 당했으니 내가 어찌 살겠는가?"하고서 물에 빠져죽자 그의 여종도 통곡하고서 "내 상전이 이미 빠져 죽었으니 어떻게 차마 홀로 살겠는가?"하고 역시 물에 빠져 죽었다'.

손을 잡힌 것이 치욕이라고 여겨 죽음을 선택한 그 당시 여인네들의 이야기다. 요즘 가치관으로 볼 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되돌아볼 때 유사한 일은 적지 않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지은'성호사설'에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이 중국보다 나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미천한 여자도 절개를 지켜 개가(改嫁)를 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돼 있다.

여성에게 정조와 굴종을 강요했던 지난 인습을 추억하는 게 아니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건 더욱 아니다. 혼수 문제로, 시댁 또는 친정 식구와의 불화 문제 등으로 백년해로를 약속했던 이들이 서슴지 않고 갈라서는 요즘의 현실을 개탄하는 것이다. 세태가 이러니 거리마다 '재혼하세요'라는 선전 문구가 범람한다.

징파도에 얽힌 사연은 요즘 기준으로 지나친 감이 있지만 그렇다 해도 불과 몇 백년 만에 세상이 이렇게 돌변했다.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그 옛날 징파나루의 귀부인이나 성호 이익이 살아서 돌아와 본다면 무어라 말할까?

'토산을 지나 삭령의 징파도에 이르면 강산이 맑고 깨끗하여, 비로소 서울 사대부의 정자와 누각이 나타나게 된다'라고 '택리지'는 기록한다. 여기 징파도에서 멀지 않은 왕징면 강서리에 숙종 때의 문신 미수 허목(許穆)이 말년을 보낸 은거당이 지금도 남아 있다.

신정일 문화유산 답사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